-
-
위험한 관계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68
쇼데를로 드 라클로 지음, 윤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평점 :
이 책을 읽은 2015년까지 쇼데를로 드 라클로라는 이름은 당연히 몰랐었고, 이 <위험한 관계> 역시 더글라스 케네디가 쓴 것을 사람들이 읽어보고 좋다고 지지배배거리는 줄 알았었다. 근데 케네디 책을 암만 읽어봐도 별로 칭찬받을 만한 구석이 없었던 기억이다. 그래 한 번 더 검색을 해보고 이 쇼데를로 드 라클로란 작가가 쓴 <위험한 관계>도 있다는 걸 알아 사서 읽어봤더니, 무려 175 개의 편지로만 쓰여진 서간체 장편소설이었다. 본문만 550 쪽에 이르는. 참, 주인공 이름이기도 한 <발몽>이란 제목으로 영화로 명배우 콜린 퍼스가 주인공을 한 적도 있고, <위험한 관계> 제목 그대로 내가 좋아하는 배우 존 말코비치가 발몽 역을 한 것도 있으며 <스캔들>이란 제목으로 전도연과 배용준, 그리고 이미숙이 출연하는 조선시대 버젼도 있는데 이 가운데 존 말코비치 버젼이 갑이라고 한다. 나는 스캔들, 전도연과 배용준 만 봤다. 이번엔 넷플릭스가 업데이트한 건 하이틴 19금이라는데 볼까 말까?
일단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본다는 신조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출판사가 약간 과장해서 말한 것을 내가 한 번 더 과장해, 이 <위험한 관계>야말로 19세기 위대한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의 출발선이라고 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19세기 프랑스 문학이 그토록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 토대가 프랑스에 그만큼 잡놈 잡년들이 많이 살았던 때문이었으며, 그 인류학적 특징이 한 세기 전 이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날 뿐더러 문학적 스토리 상에서도 그들의 조상님으로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하 거참, 어렵게 썼다. 반성한다.
벌써 몇 번에 걸쳐 이야기했듯, 어려서 가정교육 잘 받은 내 입장에선 이런 종류의 난잡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발몽 자작과 메르퇴이유 남작부인을 중심으로 범 사회적으로 인간사냥을 권장하는 내용, 무슨 뜻이냐 하면, 남잔 여잘 사냥하고 여잔 남잘 잡아 잡숫고, 뭐 이런 식인종들이나 하는 것들 말이다. 일찍이 한 번 읽고 몸서리치며 경원했던 사드 후작의 글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어째 보는 눈이 그렇게 없냐고 타박하겠지만, 물론 나도 그런 타박에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암만 그래도 남작 부인이 자작한테 어느 처녀 아이의 처녀성 제거를 권장하고 자작 역시 기어이, 그것을 당시 수준으로 말하자면 동영상 생중계 하는 장면이라든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정숙한 여인을 무너뜨리기 위한 파렴치 행위 같은 것들의 묘사는 아무리 세월의 때가 많은 묻은 나도 읽기에 즐겁지 아니했다. 내 취향엔 이런 류의 글보다는 차라리 인터넷 야설이 더 낫다. 요즘엔 보기 힘들어서 그렇지.
때는 프랑스 혁명 전, 브루봉 왕가의 최고 방탕시절. 왕족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브루주아부터 브띠까지 일부 양심있는 인텔리 층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신민들이 음탕과 혼음과 배반과 물질만능과 수탈과 탐욕과 착취를 하거나 당하던 시절에 피울 수 있었던 최고의 악의 꽃을 볼 수 있는 책. 그리하여 드디어 1789년은 올 수밖에 없었고 그 족속들의 대가리가 단두대의 퍼런 칼날 아래서 툭툭 동백꽃 모가지 떨어지듯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반어적으로 보여주는 소설. 하지만 어디서도 그런 역사 의식이나 사회의식 별로 찾을 수 없는, 그러나 현실을 과장하여 잘린 단면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엉뚱하게도) 차갑게 인식할 수 있는 (내가 읽기에 그렇다는 얘긴데) 드라이한 하이퍼 레알리즘 소설.
여태까지 쓴 것과는 별도로 재미있고 기념할 만한 소설인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