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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ㅣ 제안들 35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찌 비트키에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2년 2월
평점 :
비트키에비치는 1927년 말에 <탐욕>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이 작품은 작가에게 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근현대 소설사, 무르익은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문학사에 작지 않은 탑 하나를 세우게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지난 세기말의 퇴폐주의적 또는 악마숭배적 묘사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데, 나는 이것이 비트키에비치가 아직도 세기말 주의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19세기 토마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이나 미하일 불가코프의 <모르핀>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당대까지는 지금처럼 엄격하지 않았던 ‘약물에 대한 관용’의 덕을 본 상태에서 글을 썼기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한 가지 감정이나 상황, 또는 사물에 관해 실로 무지막지하게 장황한, 게다가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사법이 쏟아지는 문장을 읽을 때의 난처함을 매우 자주 실감할 수밖에 없다. 불어, 독어, 영어, 노어, 여기에 자국어인 폴란드 말까지 섞어 정말 유창하게 쏟아내는 말장난까지 합쳐지면 대략 난감하기 그지없다.
책의 115쪽에 푸트리찌데스 텐키에르 라는 이름의 마흔두 살의 천재적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심한 장애인 작곡가가 피아노 연주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좀 길더라도 인용해보자.
“스타인웨이 피아노에 다가가―연주하기 시작했다. (오, 세상에, 어떻게 연주했는지!!!) 마치 땅 밑의 인간 내장이 하늘로 폭발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지상의 하늘이 아니라 진실로 무한하고 공허한 우주적인 무의 하늘이었고, 그곳으로부터, 형이상학적인 돌풍의 구름들로부터, 납작하고 기어 다니는, 불타는 불모의 비밀의 가장 밑바닥까지 무너졌다. 세상의 결속은 삐걱거렸다. 멀리서부터 죽음의 안도감이 반짝였는데, 그것은 눈앞의 무한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초(超)신적인 고문의 바퀴에 시달려 망가진 무명의 신들의 부드러운 점으로 변한 죽음이었다.” (115~116쪽)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연주에 관한 직접적인 묘사가 이것의 두어 배쯤 더 진행하고, 이어서 주인공 게네지프의 다양한 인식의 전환으로 이어지다가 지금 연주하는 텐키에르의 작곡 작업까지 계속되고, 문제는 비단非但, 위에 인용한 피아노 연주 상황이 아니더라도, 도대체 작가가 지금 무엇을 주장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자주” 벌어진다. 이리하여 독자는 환장할 지경이 된다.
당신이 이 책을 구입했다면, 푸트리찌데스 텐키에르가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하는 115쪽까지 읽을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할 것이다. 저 지점까지 읽었다 해서 좋아하지 마시라. 이제 책의 11.5%에 도달했을 뿐이니. 그렇다고 실망할 것도 없다. 다만 시간이 문제지 당신은 장황하게 펼쳐지는 다중인격 소유자와 대체역사를 주제로 한 작품이 얼마나 허망하게 결말을 맞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만일 피아노 소리와 인류 역사의 사실상 마지막 작곡가인 텐키에르의 연주를 듣지 못하고 일단 책을 책꽂이에 꽂는다면, 당신이 다시 이 책을 읽어볼 것이라는 생각은 접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 책은, 적어도 6백쪽 정도 까지는 문장을 분리해 주어, 목적어, 서술어를 탐색해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분명하게 약쟁이였을 비트키에비치의 코카인에 빠진 형이상학적 문장을, 다시 얘기하건대, “해석하는 대신 직관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나는 그랬다. 나는 6백쪽, 6백쪽? 어쩌면 7백쪽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정말로 주장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문장 속 구절과 단어들의 조합이 비록 구체적이지 않지만 마치 하늘에 뜬 구름 모습을 보고 닭장 속 암탉이 알을 두 개 낳았는지 세 개 낳았는지 짐작하는 것처럼 읽었다. 그래도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 8백쪽을 넘어가면서 어느새 작가의 문장과 표현이 익숙해졌는지 “직관적”보다는 더 향상된 책읽기가 가능했다. 소위 길이 보이더라는 말씀. 그리하여 한 번 더 읽으면 초독보다 훨씬 부드럽게 읽히겠지만, 아이고 어머니― 편히 쉬시기를― 그럴 마음이 지금은 눈곱만큼도 없다. 눈곱만큼도 없을 정도로 오랜만에 책 한 권 읽느라고 똥을 쌌다. 그것도 푸짐하게.
이렇게 쓰고 보니, 거 참. 나야 일개 독자로 그저 읽기만 하는데도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이 작품을, 그것도 서문까지 합해 천 쪽이 넘는 길고, 길고, 또 길고 긴 데다가 문장까지 오리무중의 험한 “폴란드 어” 텍스트를 우리말로 번역한 역자 정보라는 이 고생을 해서 번역료 얼마를 받았을까? SF 소설에 관심이 없어 그렇지 역자 정보라가 <엽기 토끼>인가 <낭만 토끼>인가, 확인해보니 <저주 토끼>가 맞는데 이걸로 부커-인터내셔널 숏 리스트에 오른 작가란다. 하여간 이이도 <탐욕> 번역하느라고 얼마나 똥을 쌌을까? 팔자다, 팔자.
평소의 독후감을 염두에 두면, 늦어도 지금쯤이면 작품의 줄거리가 조금 나와줘야 한다. 이 길고 읽기에 고통스러운, 그러나 기념비적인 장편소설을 정말로 읽을 독자가 있다면, 소설의 줄거리는 책방의 미리보기를 통해 알 수 있다는 정도로 끝을 내고 싶다. 이렇게 얘기하면 저자와 역자가 조금 기분 상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아참, 출판사 워크룸프레스도, 스토리는 분량과 비교해서 그리 복잡하지 않아 책의 9쪽에 실린 “이 책에 대하여”에 쓰인 내용이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고 최대로 많이 줄거리를 소개한 것일 터이다. 그래 지금은 줄거리나 작가 소개보다는 이 책이 어떤 면에서 독특한지에 관해 중점을 두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알랭 로그브리예와 나탈리 사로트 같은 프랑스 누보로망 계열의 작가를 떠올렸다. 로그브리예와 사로트가 사물과 순간을 포착해 완전히 건조한 상태에서 하이퍼 레알리즘 적 묘사를 한 것과 유사하게 비트키에비치는 등장인물의 유동적인 감정과 상태, 상황을 최대한 자세하게 표현하려 한 것 같았다. 누보로망 작가들과 달리 이이는 다분히 약물에 의존한 지경에서, 혹은 그 지경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보이는데, 실로 무수한 단어들을 기총소사하듯 난사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저 골치 아픈 누보로망 작가를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이제 열아홉 살이 된 주인공 게네지프의 아버지가 죽음을 맞아 장례식을 치루었으나 작가는 장례식 따위는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걸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잘라 말할 때였다. 그 다음이 게네지프가 자기 엄마보다 더 나이가 많은 이리나 브시에볼로도브나 티콘데로가 공주와 처음으로 이성간 섹스를 하기 위해 담을 넘다가 담장 위에 방범용으로 꽂아 놓은 깨진 유리조각에 손바닥을 심하게 베어 피가 철철 흐르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후에 공주가 치료를 해준다거나 따로 처치를 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듯 작가가 곧바로 잊은 것일 거라고 짐작했을 때였다. 그러다가 저 뒤, 868쪽에 이르면 괄호를 치고 이런 선언을 한다.
“우리 문학을 망치는 이 저주받을 자연 풍경과 분위기 묘사는 그만하자. 이런 배경에선 본질적인 것들을 만들어 낼 수가 없고 감상적인 이런 장면들 때문에 정교한 심리를 간과하게 된다.”
이게 비트키에비치 소설, 적어도 <탐욕>의 진리일 것이다. 이 바탕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사고를 치는 게네지프의 심리, 행동 변화가 중점이 된다. 게네지프는 책 속에서 여러가지 애칭으로 불린다. 지프치오, 지페크, 지프카, 지풀카, 지폰 등등. 슬라브 소설책을 처음 읽을 때 곤혹스러운 점 가운데 성명이 이름-부칭-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걸 아시아인 입장에서 보면 자기 마음대로 막 섞어 부르는 것 같은 점과, 많고도 많은 애칭 때문에 정작 누굴 지칭하는지 헷갈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선 주로 지프치오가 많이 쓰이고 가끔 게네지프와 지프치오는 같은 육체의 다른 인격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호칭을 바꿈으로 인격 변화를 설명하기도 한다.
“나중에 그(게네지프)는 지프치오의 얼굴로 기어 나와서 그의 낯짝으로 기어들어 가 주둥이에 달라붙었고 모두들 이 젊은 생도의 눈에 나타난 이상한 표정에 놀랐다―이미 그것은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을 알지 못했다―그것은 이전의 인격과는 공통점이 아무것도 없는 바로 그 ‘후[後]심리적 인격이었다.” (755쪽)
위의 인용은 게네지프가 처음으로 살인한 바로 직후에 그를 묘사한 것이다. 첫 살인? 그러면 나중에 누구를 또 죽이느냐고? 그렇다. 누구인지는 알려드리지 않겠지만 하여튼 그렇다.
작품은 당시 시각에서 미래 소설로, 세계는 전부 공산화되었고, 폴란드만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폴란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경계를 이루는데, 이걸 의인화하자면 후심리적 인격인 게네지프 역시 하나의 경계라고 할 수 있을 것.
여기에 중국이 새로운 공산주의의 대표주자로 등장해 키릴 황제가 다스리는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진격해 점령을 해버리고 이어서 폴란드까지 침공한다. 어떻게 중국이? 중국이 한자어를 버리고 알파벳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자를 사용하니 이제껏 자신들이 만들어 왔던 놀라운 문화와 문명, 이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력까지 전 세계를 압도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의견이 놀라웠다.
곤혹스러웠지만 한편 즐거웠던 책 읽기였다. 아무리 천 쪽이라지만 그깟 천 쪽을 읽기 위해 일 주일을 통째로 헌납해야 했던 즐거운 “고뮨”. 지금 말한 ‘고뮨’은 ‘고문toture’이다. 그런데 왜 ‘고뮨’이라 썼는지, 정말 알고 싶으시면 책을 읽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