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년 전에 처음 읽은 <처녀들, 자살하다>

 

  2017년에 처음으로 제프리 유제니디스를 읽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나왔다가 지금은 품절인 <처녀들, 자살하다>. 미시간 주의 도시에서 한 부르주아 가정의 다섯 자매가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쓴 것으로 유제니디스가 1993년에 처음으로 발표한 장편소설이었다. 유제니디스는 첫 작품이 베스트셀러 자리에 등극하는 기쁨을 맛보았고, 두 개의 작지 않은 상을 받아 기쁨 두 배가 되었다가, 1999년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딸 소피아 코폴라 감독에 의하여 영화로 만들어져 돈벼락까지 맞는 행운을 누린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몰라도, 자살에 이르기까지 자살 당사자들이 얼마나 죽고 싶어하지 않았는지,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들에게 무수하게 날렸던 구조 신호, S.O.S.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간절한 마음으로 보낸 모스 부호에도 불구하고, 진지하다고 읽히지 않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2. 신화적 상상력을 보탠 <미들 섹스>

 

  

  시간이 지나 <처녀들…>의 감상이 거의 잊혀지고나서 두번째 작품 <미들 섹스>를 읽는다.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 본인이 그리스 이민 2세의 부계에서 태어나서 그랬는지 터키의 그리스인 주거지역 출생의 그리스 부계를 가진, 여자로 길러졌지만, 제5알파환원요소결핍증후군이란 긴 이름의 장애로 남성의 생식기가 몸 밖으로 탈출하지 못한 남자로 판명이 된 칼 스테퍼니데스를 둘러싼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당시엔 그리스 땅이었지만 사실은 어엿한 터키의 영토에서 생활했던 칼의 조부모의 다분히 그리스 신화적 생활방식과 터키 탈출, 남성으로 태어났다가 여성으로 살고, 다시 남성으로 바뀌는 또 하나의 그리스 신화 티레시아스의 유방 이야기를 정말로 찰지게 써놓아 단박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도 2003년에 퓰리처 상을 비롯해 굵직한 상들을 싹쓸이한다. 이런 흥미 요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표지 디자인 때문임직한데, 실제 재미보다 훨씬 저평가된 거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3.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지 않았더래요. <결혼이라는 소설>

 

  <미들 섹스> 이후에는 굳이 유제니디스를 검색해서 <결혼이라는 소설>을 찾아 읽었다. <처녀들…>은 1990년대에 1970년대를 이야기하는 형식이고 <결혼이라는…>은 1980년대 이야기를 2010년대까지 끌어간다. 1980년대에 찬란하게 피어났던 젊음의 삼각관계. 천재에 버금가는 총명한 청년 레너드 뱅크헤드가 지방대학이지만 전직 총장의 외동따님 매들린을 꼬드겨 결혼에 성공하지만, 매들린을 짝사랑하는 순정파 미첼이 이들을 지켜보는 이야기. 놀랍게도 <결혼이라는…>을 정의하자면, “21세기에 쓴 빅토리아 시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처음엔 미첼과 매들린이 친했으나 애초에 조울증 증세가 심각한 레너드의, 조증 상태가 충만할 대 뿜어져나오는 천재형 광기에 반한 매들린은 레너드를 선택했고, 결혼해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대신에 결혼이라는 지옥 또는 거미줄에 걸려버린 진퇴양난까지 유제니디스는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들의 결혼에 좌절까지는 모르겠고 뜻을 접은 미첼은 인도 콜카타까지 날아가 마더 테레사 팀에 합류해 자원봉사를 하게 되는데, 이게 유제니디스가 직접 경험한 바인 것도 재미있다.

 

 

  4. 단편은 이래야 하느니라, 《불평꾼들》

 

   단편집 《불평꾼들》은 원래 제목이 《신속한 고소 Fresh Complaint》로 작품집에 마지막으로 실린 단편의 제목이었는데, 가장 앞에 실린 작품의 제목을 우리말 제목으로 삼았다. 유제니디스가 1960년생. 작품활동을 30년이 훨씬 넘게 했건만 장편소설이 세 편이고 단편은 열여덟 편 가량 발표했다. 《신속한 고소 Fresh Complaint》에 실린 것을 포함해 모든 단편 소설 중 몇 편은 다음에 장편소설로 확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고, 책을 읽으면서 장편에 들어있는 에피소드를 발견하는 일도 있어 반갑기도 하다.
  책에 실린 열 편의 단편소설. 재미있다. 여든여덟 살의 치매 초기 할머니 델라와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일흔 살 할머니 케시. 이들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읽는 두 여자 알래스카 인디언의 생존기인 <두 늙은 여인>을 매개로 어쨌든 삶을 현명하게 이어가는 따듯한 이야기인 표제작 <불평꾼>도 좋고, 콜카타에서 1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고 이제 시암만의 열대 섬에 휴양차 왔다가 이질에 걸려 박테리아를 굶겨 죽이기 위하여 단식을 시작해 드디어 완치됐다고 믿는 <결혼이라는…>의 주인공(가운데 한 명) 미첼도 재미있다. <미들 섹스>에서도 등장한 뉴욕의 대학병원 내분비 내과 전문의 루스 박사는 <신탁의 음부>에서 이름도 바꾸지 않고 다시 등장해 자신의 견해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학회의 마지막 순서로 공로패를 받고는 술에 취해 실수로, 실수인지 아닌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면서, 호텔 계단실 저 위에서 공로패를 떨어뜨려 산산이 박산을 내고 만다.
  <결혼이라는…>의 매들린처럼 틀림없이 불행해질 결혼은 저지르기 싫지만 아이는 하나 낳고 싶은 토마시나는 옛 애인들인 스튜 워즈워스, 짐 프리슨, 그리고 윌리 마스의 정액을, 새삼스레 섹스를 통하는 방법 말고, 그들의 재량에 의지해 소량 추출하여 잘 블랜딩한 다음 체내에 주입, 임신을 하기로 결정을 한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크게 파티를 연다. 섹스를 매개로 하지 않았고, 토마시나가 이미 자궁벽이 얇아질 대로 얇아진 40대 여성이란 점을 감안한 짐 프리슨의 아내는 기꺼이 남편의 정자를 공여하는데 미소를 지으며 동의해 벌써 몇 씨씨의 정자를 채취해 세면대 아래 작은 통에 보관중이다. 게다가 자기 남편의 아이일 확률도 33퍼센트에 지나지 않느냐는 말이지. 토마시나는 역시 40대가 되도록 자신과의 결혼을 기다리며 세월을 죽여나간 165센티미터의 키는 작지만 매력이 넘치는 윌리 마스에게도 방법을 상세히 설명을 하는데, 하, 이건 정말 재미난 이야기라서 결말을 알려드릴 수 없어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작품의 제목은 <베이스터>다.
  브라운 대학을 우등 졸업한 유제니디스가 다시 입학한 스탠퍼드 대학원의 문예창작 학과는 졸업 논문 대신 졸업 작품을 제출해 통과해야 하는 모양인데 이때 낸 것이 <변화무쌍한 뜰>이다. 이혼했거나 별거중인 마흔세 살 먹은 아일랜드 남자 숀이 로마에서 돌아온다. 공항에서 미국인 여성 여행객 두 명, 예쁘게 생긴 애니와 못생긴 마리아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온다. 그랬더니 집 앞에 궁상맞은 꼴로 앉아 있는 이혼한 친구 맬컴이 보인다. 숀은 애니 한 명하고만 집에 들고 싶으나 어쩔 수 없이 객식구 두 명과 함께 들어가보니, 텅 빈 냉장고에 먹을 게 하나도 없다. 애니 한 명이면 시내 음식점이라도 가겠지만 군식구 입도 입인지라 돈이 아까워 가지 못하는 숀. 뜰을 돌보는 건 집을 비운 아내가 하는 일인데 아내가 없으니 아주 엉망이다. 그런데도 거기서 숀은 먹거리, 아티초크를 찾았다. 그래 아티초크를 데쳐 요리를 하고, 식사 후에 주사위 게임을 하면서 못생긴 마리아와 맬컴이 자는 사이에 어떻게 한 번 해보려는 마음이 숀, 그리고 애니도 충만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면 그건 소설도 아니라서 일은 자꾸 어긋나기만 하는 거.
  이때 유제니디스가 다른 작품을 발표한 상태, 우리식으로 말하면 이른바 등단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위키피디아를 참고하면 초기 작품 열 편을 선정해 책을 만든 거 같다.

 

  나는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도시 취향이 맞다. 야생과 자연의 이야기보다 도시인들이 벌이는 발칙한 난장판을 훨씬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단편집 《불평꾼들》은 내 취향을 제대로 직격한다. 이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깨끗한 심성과 맑은 영혼을 가진 분들이 읽기엔 조금 난감할 여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어떠랴.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덮으면 그만이지.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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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2-22 0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불평꾼들>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페이퍼 감사합니다.

Falstaff 2022-02-22 09:04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별 다섯 개짜리 독후감을 쓸까, 페이퍼를 쓸까 하다가 이쪽으로 왔습니다. 읽고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단발머리 2022-02-22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녀들, 자살하다> 읽어보려고요. 다 읽고 싶은데 속도가 따라주지 못해서 제일 끌리는 걸로 간신히 한 권 골랐습니다. 좋은 페이퍼 감사해요!

Falstaff 2022-02-22 10:56   좋아요 1 | URL
전 그 책이 유제니디스 가운데 별로 좋지 않았거든요. ㅎㅎㅎ 다 인연입지요.

새파랑 2022-02-22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단 불평꾼들은 읽어봐야 겠군요 ㅋ 품절은 못읽으니 😅 일단 단편읽고 장편을 도전해야 겠군요~!!

Falstaff 2022-02-22 10:57   좋아요 2 | URL
좋은 선택입니다. 오랜만에 만족한 단편집이었습니다.
아니네요! 서머싯 몸 단편선도 재미나게 읽었으면서...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2-02-22 1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아직 한 권도 읽지 않았어요.
천천히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작품에 입문해봐야겠어요^^

Falstaff 2022-02-22 10:57   좋아요 2 | URL
옙. 천천히 읽으셔요. 뭐든지 급하면 탈나더라고요. ^^

coolcat329 2022-02-22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또 하나의 훌륭한 단편을 추천하시네요~
골드문트님이 추천하지 않는 책은 저도 읽기 싫은데 ㅎ 이상하게 처녀들...은 땡깁니다.

Falstaff 2022-02-22 12:23   좋아요 2 | URL
ㅋㅋㅋ 땡기면 해치우셔야지요!

stella.K 2022-02-24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이거 읽어보고 싶긴한데
제가 말씀하시는 그꽈를 교집합적으로 좀 가지고 있어서
읽을 수 있을까 다소 망설여지기도 하네요.
근데 그게 의학적으로 가능한가요? 세 사람의 정자를
섞어서 주입한다는 게.ㅋㅋ
솔직히 표지가 책 선택을 좌우하기도 하죠.

Falstaff 2022-02-24 15:45   좋아요 1 | URL
거기서 딱 정자 한 개가 수정에 성공하는 거지요.
기발하지 않아요? 옛 애인 세 명을 섞어서 에라, 복불복이닷!
근데 거기서도 한 작자가 아주 골때린 방법...이라기보다 수작을 벌이는 것이 을매나 귀여운지 말입니다. ㅋㅋㅋㅋㅋ

stella.K 2022-02-24 16:0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요 <불평꾼들>은
봐야겠군요.ㅋㅋ

Falstaff 2022-02-24 16:03   좋아요 0 | URL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