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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열두 편의 단편을 실은 단편집. 윌리엄 트레버가 76세였던 2004년에 출간했다.
트레버의 책은 읽을 때마다 곱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어느 쓸쓸하지만 보이지 않는 얇은 손톱이 있어 단어가 눈을 스칠 때마다 휘익 살갗을 베는 것 같은 서늘함이, 뭐라 말해야 하나, 그렇다, 애간장을 녹인다.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트레버의 책 일곱 권, 전부 마찬가지다. 이제는 트레버의 책을 새로 번역해 출간했다는 말을 듣기만 해도 저절로 구입하고, 구입한 것들 가운데 제일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이 되어버렸다. 당신은 안 그런가?
그러나, 트레버의 작품을 명작이나 걸작이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더라. 물론 현금 삼십만 원 주고 명작이라 말해달라고 하면 깊이 생각해볼 만하다. 이십만 원도 뭐 괜찮다.
게다가 더욱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밀회>가 일곱 번째 트레버인데, 이제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작품의 분위기와 내용 같은 것이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 거의 정확하게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터무니없을 듯한데, 작품 하나하나가 이미 트레버의 다른 책에서 읽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같은 작가가 쓴 것이니 당연하다. 그러나 트레버 특유의 단어와 문장과, 문장들이 모인 트레버의 핑거 프린트, 단락이 워낙 독특해, 이런 기시감을 더욱 느끼게 만드는 건 아닌지.
만일, 트레버와 같은 지역, 적어도 영어권에서 살며, 이이의 작품이나 작품집이 나올 때마다 몇 년 터울로 읽는다면 매번 위에서 말한 얇고 투명한 손톱에 할퀴어 대책없이 애간장만 녹일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에 2018년에만 네 권, 작년에 두 권에 이어 또다시 트레버를 읽으니, 조금 문제가 된 거 같다. 작년 8월 이후에만 세번째 만나는 트레버. 꽃노래도 삼세번, <밀회>가 바로 이 삼재수에 걸려버렸다. <밀회>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