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시계 - 개정판
앤 타일러 지음, 장영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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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장영희는 1952년 전시 서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윌리엄 포크너 작 <압살롬, 압살롬> 번역의 전범을 이룬 영문학자 장왕록의 딸로 태어난다. 지금은 서태평양 인근 국가에서는 박멸했음을 선포한 질병이지만 이때는 백신이 생기기 전이라 한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평생 목발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이의 사진을 검색해보라. 증명사진을 빼고 단 한 장의 엄숙한 얼굴이 없다. 늘 밝은 기운을 보이는 듯한 웃는 얼굴. 서울사대부고와 서강대 영문과를 거쳐 모교에서 석사를 하고,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곧바로 모교인 서강대 영문과 교수직에 오른다. 이후, 번역을 하며 수필가로도 이름을 내지만 병마에 그나마 부실한 발목을 잡히고 만다. 2001년에 유방암, 2004년 척추암. 이것들을 이겨내고 강단에 서나, 결국 2008년에 간암으로 전이되어 2009년,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장영희의 후기를 보면, 이 작품 <종이시계>를 처음 번역, 출간한 것이 1991년이고, 12년이 지난 2003년에 다시 새 판을 낸 것으로 보인다. 새 판이라지만 첫 번역을 완전히 잊고 다시 번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책에선 두 살과 한 살 터울의 부부가, 대화를 나눌 때 남편은 말을 놓고, 아내는 꼬박꼬박 경어를 쓴다. 이혼한 부부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이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2022년에도 아내가 남편한테 말을 놓으면, 즉 반말을 하면, 대통령 후보의 아내로는 마땅하지 않다고 시비하는 것이 현실이니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고 넘어가자. 작품의 원래 제목도 <The Breathing Lesson>, “호흡연습”이다. 앤 타일러의 작품은 그동안 많이 번역 출간한 모양인데, 많은 작품들이 원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았다. 이것도 역시 올드 패션이다. <Back When We Were Grownups>는 <인생>으로 <A Patchwork Planet>는 <바너비 스토리>라는 제목으로 2002년과 2001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작가 앤 타일러는 1941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퀘이커 교도인 로이드 페리와 필리스 마혼 타일러 부부의 네 아이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난다. 숲 속 퀘이커 공동체에서 유년시기를 통째로 보내고 열한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도시 나들이를 했으니 장래에 유명작가가 될 꼬마 아이에게 세상은 얼마나 관찰할 만한 것으로 충일했을까. 그러나 노스 캐롤라이나 랠리Raleigh의 공립학교에 입학한 앤은 자신이 아웃사이더라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후에도 소외감은 여전했는데, 이게 자신을 작가로 이끈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믿는다.
  하여튼 16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립자유예술대학인 스워스모어 대학에 가고자 했으나 결국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듀크 대학에 입학한다. 이때 부모는, 내가 부모라도 당연했겠지만, 세 명이나 되는 동생을 보더라도 명문대 가운데 하나인 듀크에 가달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당연한 거 가지고 설득이라니. 맏딸이 고집이 셌나? 하여간 듀크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 슬라브 문학 학위를 받고 도서관에서 서지학자로 일하며 소설을 써 오늘에 이른 작가다.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된 <홈시크 레스토랑에서의 저녁식사>, <우연한 여행객>, <종이시계>로 세 번 퓰리처 상 픽션 부분의 최종 심사까지 올라, 1989년에 오늘 소개하는 이이의 대표작 <종이시계>로 상을 받는다. 이외에도 부커 상 후보(한 번은 최종심, 한 번은 예심)로 두 번 올랐으며 미국에서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중간에 질려서 이제 그만 읽겠다, 도저히 더는 못 읽겠다,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왜냐하면, 주인공 매기 모건 여사가 내 아내하고 너무 똑 같은 거다. 물론 동서의 차이가 있으니 생긴 거야 비슷도 안 하겠으나, 하는 행동, 말하는 버릇, 물론 매기처럼 나한테 절대 존대말은 바치지 않지만, 존대는커녕 주옥 같은 욕이나 안 퍼질르면 다행이지만, 끝없는 수다와 기상천외한 어림짐작까지, 너무너무, 느므느므 똑같아서, 확 질려버렸던 거다. 그래 이 책을 아내에게 읽어보라 권해서 자아성찰의 기회로 만들어줄까도 싶었으나 오히려 모건 여사를 통해 더 고단수의 말빨을 장착하는 기회가 될까 두려워 그만두기로 했다.
  앤 타일러는 결혼생활에 대하여 정말 도가 튼 거 같다. 내가 살아보니 남자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게 여자하고 사는 거고, 여자 인생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게 남자하고 사는 일인 거 같다. 앤 역시 메기와 아이러 모건 부부를 통해 이 비극적 필연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이 대강 1940년 아래 위쪽 태생으로 결혼은 필연이라 여긴 세대였을 테니.
  9월. 매기의 42년 친구, 그것도 절친인 세레나의 남편이 죽어 장례식장에 가기로 한 날이다. 아무리 절친이라 하더라도 살면서 여러 번 절교와 화해를 거듭하고, 어린 시절 자신만의 비밀을 은밀히 다른 친구에게 알려주기도 하는 법. 물론 고의도 아니었고 악의도 없었지만 이런 오해가 없다면 그건 인간도 아니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 몇 년 동안 편지는커녕 전화 한 통 없었는데, 울며불며 과부가 된 슬픔이 어떠니 저떠니 눈물바람을 하는 게 당연히 장례식에는 가줘야 하는 걸로 결론이 난 거다. 하물며 암으로 죽은 맥스의 젊은 시절의 매혹적인 장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음에야. 세레나는 죽음의 병상에 누운 남편 맥스에게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단다. 살아생전 건강을 위해 조깅을 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아서, “멋진 빨간색 운동복을 입고 뛰다가 갑자기 죽은 거하고, 주사바늘과 튜브를 잔뜩 꽂은 채 병상에 자빠져 죽는 거하고 뭐가 더 좋니?”라고.
  장례식이 오전 10시 반이라 집에서 늦어도 여덟 시에는 출발을 해야 하는데, 매기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모닝 콜을 잘못 눌러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말없는 남편 아이러는 일찌감치 일어나 잠깐 일을 보고 동네 어디서 기다리기로 했으니, 매기는 서둘러 닷지Dodge 승용차 수리를 맡겨 놓은 정비소에 들러 차를 찾아 출발한다. 정문을 나가 도로로 진입하는 순간 매기는 브레이크를 밟으려다 브레이크를 밟는 힘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고, 그리하여 마치 급발진하는 차처럼 순간이동에 버금가는 속력으로 도로로 쳐들어갔으며, 때마침 왼쪽에서 질주하던 거대한 펩시콜라 트럭이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를 했음에도, 방금 정비소를 나온 닷지 승용차에서 유일하게 한 번도 상처를 입히지 않았던 왼쪽 앞 펜더를 살짝 우그려뜨리는 수준의 하느님이나 내릴 수 있는 행운을 아침부터 거머쥐었다…는 것을 메기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남편 아이러가 알면 뭐라고 할까, 변명거리만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했던 거였다. 눈 앞에 광경이 그려지시지? 어쩜 그리 똑같은지. 누구하고? 안 알려줌. 내 복장이 다 터진다.
  매기와 아이러는 슬하에 순서대로 아들 제시, 딸 데이지, 이렇게 두 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결혼 28년만에 일곱 살 손녀를 둔 건 제시가 열일곱 살 때 임신 2개월 상태인 열여섯 살 피오나와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 뭘 해. 손녀딸 리로이가 돌도 되기 전에 이혼해버린 걸. 그럼에도 매기는 아들 부부가 재결합하기를 기대해 마지 않아서 리로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 변장한 모습으로 며느리가 사는 집 근처에 숨어 며느리와 손녀딸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오기도 자주 했었다. 그런데 정비소에서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WNTK 라디오 방송 청취자 대담 프로그램에서 누군가가, 다음 주에 재혼을 할 예정이다, 첫번째 결혼은 정말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지만 잘 되지 않았고, 두번째 결혼은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라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지금 이 말이 옛 며느리 피오나의 목소리라고 믿어, 그만 깜짝 놀라 브레이크 대신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은 거였다.
  억지로 구겨진 펜더를, 바퀴가 굴러갈 정도로만 펴고 남편을 만나 아이러에게 운전대를 맡긴 후 매기의 머릿속엔 모종의 음모가 움트기 시작한다. 세레나 남편이자 옛 시절 자신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맥심의 장례식에서 얼른 나와 돌아오는 길에 피오나 집에 들러 웬만하면 다음 주에 결혼하지 말고 어떻게저떻게 지금은 오토바이 판매 일을 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하드 록 그룹의 리드 싱어 제시와 재결합을 하는 게 어떠냐고 운이라도 떼어봐야 하겠다는.
  이렇게 9월의 화창한 날, 열네 시간에 걸친 로드무비의 막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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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1-14 09:05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제가 앤 타일러를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어도 좋아하는 작가군단에 넣어두었으므로 책 여러권 읽었거든요. 저는 사실 그중에 이 작품 <종이시계>가 제일 별로이긴 했어요. 이야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 싫어서요. 완전 슈퍼 오지라퍼.. 어림짐작으로 기어코 일을 벌이는 사람. ㅠㅠ 읽으면서 몇 번이나 그만읽을까 했었어요. 휴..

아니, 근데 골드문트 님의 아내분과 성격이 똑같다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14 10:17   좋아요 5 | URL
앗, 그렇습니까!
저도 앤 타일러를 좀 더 읽어봐야겠군요. 아이고, 근데 폭포같은 수다에 팍 질려서 말입죠, 마치 보통 크기, 약간 높지만 쇳소리 음색을 가진 중/노년의 여자가 귀 바로 옆에서 따따따다다다다다... 따발총을 쏘는 거 같더라니까요!
책을 읽으면서도 귀에 정말로 들리는 듯한. 이거 참. ㅋㅋㅋㅋㅋㅋㅋㅋ 누구하고 진짜 똑같아요.

잠자냥 2022-01-14 11:51   좋아요 3 | URL
우아, 저 앤 타일러 작품 1도 안 읽어봤어요. ㅋㅋㅋㅋ 재미없을 거 같아서 절대 손 안 가는 작가. 저는 왜케 책에 편견이 많을까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14 11:57   좋아요 3 | URL
책에 편견 있는 게 말입죠, 사람한테 편견 있는 것보다는 낫더라고요. ㅋㅋㅋ
평소 다른 사람한테 편견 많이 ˝받는˝ 인간 올림.

다락방 2022-01-14 11:59   좋아요 4 | URL
잠자냥 님 앞으로 혹여라도 앤 타일러를 읽으실 생각이라면 종이시계로 시작하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제가 보기엔 잠자냥 님도 이 책속의 캐릭터에 짜증 제대로 나실 것 같아서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2-01-14 09: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너무 재밌을거 같아요. 작가와 책은 많이 들어봤는데 이런 내용인줄은 몰랐어요. 근데 매기와 아내분이 똑같다니 저도 소설에서 그런 경험 꼭 해보고 싶은데 아직 못 만났습니다 ㅎㅎ
결혼에 대한 생각 저도 살아보니 동감이에요. 서로의 만남을 위로하고 불쌍해하며 사는 수밖에요...

Falstaff 2022-01-14 10:19   좋아요 3 | URL
재미 있습니다. 너무 큰 걸 바라시면 실망하겠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한 상 잘 차려먹은 느낌이었어요! ㅎㅎ

새파랑 2022-01-14 10: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완독하셨군요? ㅋ 책의 내용도 그렇지만 매기 모건 여사가 더 궁금하네요~!!

Falstaff 2022-01-14 10:19   좋아요 5 | URL
요즘 대기하고 있는 책이 잔뜩 있는 거 같아서 함부로 추천을 못하겠고, 나중에 다 읽으시면 한 번 생각해보셔요!

그레이스 2022-01-14 14: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가물가물 기억도 안나는 책이예요^^
재미있었다는 기억만...!

Falstaff 2022-01-14 15:44   좋아요 2 | URL
재미는 있는데요, 도무지 매기의 수다와 참견과 끼어드는 건 아휴,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서 말입니다. ㅎㅎㅎ

hnine 2022-01-14 14: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이 책 원래 제목이 <호흡연습>이었어요.
사실 저는 이 책 안 읽었는데도 마치 읽은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예전에 그 정도로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였기때문이겠지요.
늘 저자나 번역자에 대한 친절한 소개로 시작하는 골드문트님의 리뷰, 이제 적응이 되었답니다.

Falstaff 2022-01-14 15:45   좋아요 2 | URL
아,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군요.
전 퓰리처상 받았다고 해서 한 번 읽어볼까 했습지요.
ㅎㅎㅎ 매번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mini74 2022-01-14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본 것 같은데 ㅠㅠ 했더니 정말 오랜 전 20대때 헉 겁나 옛날이군요. 그때 읽은거 같아요. 표지가 바뀌었군요. 아내와 닮은 주인공 힘들죠. 책은 약간 도피의 성격도 있는데 거기서 현실을 만나면. ㅎㅎ

Falstaff 2022-01-14 19:07   좋아요 1 | URL
아, 오래 전에 보셨구먼요. ㅎㅎㅎ 다시 읽으실 필욘 없.... 아닙니다, 옛 생각 나시면 후딱 읽어보셔요. ㅎㅎㅎㅎ
맞아요, 기껏 책으로 도망했는데 또 보는 겁니다. ㅋㅋㅋㅋㅋ 인생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