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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집 ㅣ 범우문고 33
조병화 지음 / 범우사 / 1988년 6월
평점 :
품절
1921년 안성 출생이다. 5남 2녀 가운데 5남으로 태어났으면서도 교육시키기 위해 엄마 진종 여사께서 어려서 서울로 데려가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범대학의 전신인 경성사범학교 보통과와 연습과, 합해서 7년 풀코스를 다 마쳤다. 이어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하고 1945년 귀국해 경성사범학교 이화학실에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일본인 선생이 섬으로 떠났으니 빈자리가 많았을 거 아닌가. 그래 스물다섯 약관의 나이로 경성사범에서 물리를 가르친다. 이후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하여튼 제물포고 또는 인천중학에서 물리와 수학 교사를 하다가 1949년부터 서울고등학교에서 물리, 수학, 작문 교사를 겸임한다. 이때 스물아홉 살이었다. 불과 1년 후 한국전쟁이 터지지만 조병화는 국내 굴지의 서울고 교사라는 직책이라서 그랬는지 징집당하지 않고 피란지 부산에서 허무와 패배의식에 싸인 시집 《패각의 침실》을 출간하기도 한다. 다른 젊은이들은 전장에서 수없이 죽어 나가는데 그럴 수 있느냐고? 다 그런 거다. 전쟁 중에 일어나는 인간 상실은 남은 자에게 슬픔과 동시에 허무의 분위기를 분사하는 법이라서.
전쟁이 끝난 후에는 펜클럽 회원으로 1957년부터 일본, 대만을 시작으로 국제펜클럽 회의에 참석한다거나 문화 시찰단의 일원으로 세계각지를 여행하기에 이른다. 자기 시에 이야기한 대로 전 세계 방방곡곡 원 없이 다녔단다. 1950년대부터. 이런 사람 한 명 더 안다. 이어령. 그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내가 읽은 몇 권 되지 않는 수필집이다. 이러니 조병화야말로 1920년대식 은수저 물고 난 옥동자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는다. 대개 일제 강점기 옥동자들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거덜이 나기 일쑤인데 부르주아에다가 재수도 좋았던 모양이다. 하여튼 1959년에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임용이 되어 현대시론을 가르쳤고 60년대 들어서도 오대양 육대주 비행 마일리지가 어마어마했다. 1981년부터 인하대학 문과대학 학장으로 스카우트, 아니지 모심을 당해 대학원장까지 지냈으니, 한 세상 잘 먹고 잘 놀다, 엄마 찾아 간 인물이다. 진짜다. 그의 시 <봄은 어머님 목소리부터>의 마지막 두 연이 이렇다.
봄은, 하늘 나들이 하시는
어머님 목소리로부터
첫 기별 온다
어 너 잘 보다 오너라 (부분)
그래서 그렇게 갔다. 시인과 함께 경희대 국문과에서 시를 가르치던 교수이자 시인 박이도는, 조병화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시단에서 가장 많은 시를 써 시집으로 묶은 것, 가장 많은 베스트 셀러를 기록한 일, 그리고 해외여행을 제일 많이 한 시인 등의 사실이 그러하다. 또 그는 물리학을 전공한 수재로서, 회화(繪畵)에서도 일가를 이뤘으며, 럭비 선수로서 스포츠맨쉽도 지닌 지(知) · 덕(德) · 체(體)를 겸비한 신사(神士)인 것이다.”
부잣집 아드님이지, 공부 잘 해서 수재란 소리 듣지, 우리 시단에서 가장 다작을 했는데 베스트 셀러지, 럭비 선수로 해 건강하기도 하지, 대학교수로 평생을 지냈지, 다른 이들은 전쟁 중에 죽어 자빠지거나 불구가 되는 마당에 손톱 끝 하나 깨지지 않았지, 참 신사(神士), 신god이다, 신. 미친다. 박이도가(시인 가운데서도 원로 시인이) 진짜 신사를 神士라고 쓴 건가? 하긴 이 정도의 스펙을 가진 조병화를 神士, 기독교의 신 말고 적어도 희랍 신화의 숱한 신 가운데 말석 하나는 줘도 좋음직한데, 암만 봐도 紳士의 오기 같아서 말이지. 하여튼 안 써도 좋을 곳에 한자어 썼다가 이런 꼴을 당한다니까 글쎄.
오늘 헛소리만 잔뜩 늘어놓는 이유는, 몇 십 년 전에는 쓰는 시마다 절편이요, 자자이 관주에다가 베스트셀러였을지 모르지만 오늘 읽어보니 조병화의 시들이 제일 어울릴 만한 곳이 유행가 가사 정도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제일 앞에 실린 <추억> 전문을 읊어보겠다.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전문)
위 <추억>에 그럴듯한 곡을 붙이면 정말 괜찮은 가곡도 되겠고, 유행가도 되겠다. 유행가 중에서 발라드, 포크로 아주 제격 아닐까?
박이도의 시인 소개를 보면 럭비 선수 출신인데, 시는 연애시도 많고, 달달하고, 예전 표현으로 소녀 감성이 충만하다. 넘쳐흐른다. 하긴 강건하기로 두 번째 자리가 서러울 신석정도, 독립 운동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강력한 우익활동을 했던 김영랑도 간지러운 눈물, 어머니, 슬픔 등의 퇴영을 노래하기도 했으니 크게 이상한 건 아니다. 다만 석정과 영랑이 활동하던 시기와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 떨어져 있어서 돋보일 뿐.
물론 조병화가 이런 노래를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시를 쓸 수 있었고 독자들도 조병화, 편운(片雲: 조병화의 호)의 시집을 사기 위해 주머니를 털 수 있었을 테니 꼭 언짢은 건 아니다. 이래저래 하여튼 편운의 살아생전 잠시나마 우리나라가 시의 나라로, 전 세계에서 일인당 시집 구입이 가장 많은 나라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으니 여기에 편운의 공로가 없지는 않을 터이다. 어떤 시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느냐고?
초 상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 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