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의 옛 연인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8월
평점 :
우리가 흔히 윌리엄 트레버라고 칭하는 윌리엄 트레버 콕스 경(Knight Commander: KBE)은 1928년에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 코크 주 미첼스타운에서, 아일랜드 거주 중산계급 영국인 은행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직업 때문에 대여섯 군데의 아일랜드 지역에서 자라다가 더블린의 콜럼바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트리니티 대학에서 역사학 학사학위를 받는다. 이 역사학도는 트리니티를 졸업하고 트레버 콕스라는 이름으로 엉뚱하게도 조각가로 활동하기도 하다가 1952년에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평생을 함께 할 제인 라이언과 결혼하고 2년 후엔 영국에 정착한다. 트레버의 바이오그래피를 다시 확인한 이유는, 그저 검색을 해봤을 뿐인데 두 아들의 이름이 패트릭과 도미닉 ‘콕스’라고 나와, 혹시 아들 둘 달린 돌싱하고 결혼을 했을까, 싶어서였다. 하여튼 이이가 아일랜드에 사는 잉글랜드 인의 자손이었다는 건 <루시 골트 이야기>에서 짐작을 했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윌리엄 트레버를 아일랜드의 소설가, 극작가, 단편작가로 여기고 있다.
이이가 1964년부터 2008년까지 호손덴 문학상을 시작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의 온갖 문학상을 싹쓸이 했는데, 아쉽게도 받지 못한 상이 두 개가 있으니 하나는 노벨문학상이고, 다른 하나는 다섯 번이나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하는 부커상이다. 그의 숱한 작품 가운데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작품의 면면을 보면, 그까짓 노벨상이나 부커상 같은 건 받지 않아도 너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게 진짜로 트레버의 작품성이 뛰어나서 그런지, 아니면 그의 작품 속에 충일한 상실과 치유의 정서가 우리나라 독자들하고 딱 맞아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두 경우 다인 거 같지만.
윌리엄 트레버가 우리나라 책방에 소개된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 나온 <펠리시아의 여정>을 빼면 나머지는 2015년부터 18년까지 시중에 나왔다.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트레버는 2018년 5월에 구입했다. 당시 구할 수 있는 모든 트레버를 다 읽은 셈이었고, 여전히 그런 줄 알았다가 그해 8월에 출간한 《그의 옛 연인》을 이제야 읽게 됐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트레버는 언제 읽어도,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좋다.” 말고 별로 찾을 수 없다. 여전히 좋다.
열두 단편소설을 실었다.
언제부턴가, 아주 오래전에 저지른 실수와 잘못들이 생각날 때마다 미치겠다. 진심이다. 물론 형사 입건이 될 정도의 잘못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젊은 시절 저질러놓고 당시엔 그게 창피한지도 몰랐던 것들이 떠오르기라도 하면 아무리 머릿속에서만이라도 창피하고 부끄럽고, 홧홧거리기도 해서 소리 내 책을 읽던지 혼잣말을 하던지 하는 경우가 많다. 진짜다. 내가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이라면 이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글감으로 쓸 수도 있겠지만 그럴 주제로 아니니 어떤 일들이었는지 타인에게 밝혀 굳이 새로이 쪽팔림을 무릅쓰기는 싫다. 나이 들면 다들 이렇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울증의 초기증상일지도 모른다. 정말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저 먼 시절, 어쩌면 그냥 지나간 추억의 부스러기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생각하지도 않았던 기억이 수시로 불쑥 피부를 자극하는 기분.
혹시 당신도 이런 증세가 있다면, 윌리엄 트레버를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누구나 까마득하게 먼 곳에, 아니면 까마득하게 먼 곳이라고 착각하는 곳에 두고 온 자잘하거나 덩어리가 져 있거나 아니면 커다랄 수도 있는 잘못, 실수, 착오, 오해, 비탄으로 끝난 연애, 저질러버린 불손 등이 있을 수 있어,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문득, 비록 짧은 시간일지언정 그게 언제까지 짧은 시간일지는 모를 상처, 딱지까지 떨어져 아문 줄 알았더니 여전히 아프게 벌어진 상처가 느닷없이 당신의 등골을 덮치는 증세가 있는 당신에게, 치명적이지는 않더라도 당신의 상처를 덮은 딱지와 말라붙은 붕대를 한 순간에 떼버리는 격통을 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당신이 느낄 격통은 정신이나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아픔이 아니니. 당신이 이 책 《그의 옛 연인》을 통해 얻을 격통은 작품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비롯하는 감각의 건강한 통증, 기원전 몇 백 년 전의 희랍 사람들이 말했던 ‘쾌락’과 매우 유사한 접촉성 엑스터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