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저택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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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씨 451> 단 한 권을 읽고 브래드버리는 읽지 않으려 했었다. 그러나 SF 쪽으로 워낙 유명한 이라서 한 권만 더 읽어보자 싶어, 현대문학단편선 《레이 브래드버리》와 이 책, 둘을 놓고 싼 것으로 선택했다. 딱 한 권만, 이게 마지막이다, 이런 마음으로.

  그런데, 읽으면서 처음 느낌은, 브래드버리가 이런 작가였어? 하는 거. 이건 놀랍게도 <화씨 451>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감각적이고 섬세한 문장이었다. 왜 전에는 글 속의 이런 결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책 뒤에 쓰인 작가의 말 속에, <시월의 저택>은 1945년에 처음 집필을 시작해서 2000년에 간신히 작업을 끝낸 데 반해, <화씨 451>은 월요일에 착상을 얻고 9일 만에 단편의 형태가 완성됐다고 한다. 그만큼 오랜 세월 공을 들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번역자의 우리말 실력 때문일까?

  정말 그랬다. 이 책을 요약하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하지만 하룻밤을 재미나게 보낼 수 있었던 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름 끼치는 여름밤의 스릴 때문이 아니라 작가의 유려한 문장을 감상하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문장들은 작품의 뒤편에 더 조밀하게 나온다. 하긴 문장 말고도 브래드버리의 귀신 이야기가 우리가 통상 알던 귀신을 다 망라하면서도 무지하게 색다른 면모를 보여, 거 참 별 귀신들이 다 있네, 하면서 저절로 읽게 되리라.

  지난주 밤에 읽었다. 아내는 몇 년 만에 친정 가서 일찌감치 전자레인지에 햇반 2분 돌려, 더우니까 얼음물에 말아 참기름 똑 떨어뜨린 명란젓 반찬으로 훌훌 들이마시고(백신 맞아 술도 못 마시고), 후딱 샤워 한탕 한 다음, 제일 작은 방에 틀어박혀 에어컨 틀었다. 그놈의 전기료 무서워서. 침대 옆에 펴놓은 상 위에 독서대 올려놓고 방바닥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상위가 너무 어지러워 도무지 거긴 앉지도 못하겠다. 아이가 쓰던 작은 방이다. 조명도 딱 책 볼 만큼만. 과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귀신 이야기책에 몰두하는 모습. 짐작하실 수 있을 듯. 그러다가 갑자기 방 밖 어디서 무언가가 쓰러지는 따다닥, 소리. 어 이거 뭐야. 분명히 집 안에서 들리는 건데! 이미 내일이 시작된 시간, 에어컨 바람 때문이라고 주장하지 못할 소름이 팔뚝에 오소소. 나가볼까? 말까? 아, 가부장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여. 명색이 가장이라 빈집이라도 확인을 해봐야 한다는 의무감. 불 꺼진 거실과 침실, 책방, 주방, 큰아이 쓰던 방, 앞 베란다, 뒷베란다, 화장실들. 아무도 없다. 그래도 여전히 오소소, 머리카락이 곤두선 느낌. 엣다 모르겠다. 확인하자마자 얼른 방으로 (도망치듯) 돌아와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무리 소프트해도 귀신 이야기는 귀신 이야기더라.


  일리노이주 북쪽. 태초엔 풀이 무성한 초원 한가운데 꼭대기에 뒤틀린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선 언덕이 있었다. 이곳에 저택이 왔다. ‘저택이 있었다.’가 아니라 저택이 왔다. 마치 중국식 황제의 묘지 같은 곳에 런던식 거대한 전면을 가졌고, 아흔아홉 개인가 백 개의 굴뚝이 솟은 저택. 수많은 전설과 미신과 주정뱅이의 헛소리에 의하면 단 하룻밤 만에 완성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 크고 큰 집. 그러나 이 저택은 미래의 자식들을 불러들이는 데 실패하고 마는 운명이기도 했다.

  백 개에 달하는 방의 모든 침대에는 거의 인간과 흡사한 존재들, 마당에는 미친개, 지붕엔 살아있는 가고일 등이 있었다. 어떤 존재가 살았을까. 혹은 깃들었을까.

  가장 나이든 존재는 청나일과 백나일 전체를 다스렸던 4천4백 년 전 파라오의 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이자 모든 걸 기억하는 이이며, 사자의 서에 기록된 역사를 완벽하게 들려줄 수 있는 영혼이며 위대한 파라오 네페르티티의 어머니인 네프. 온몸을 상형문자가 새겨진 파피루스 붕대로 감싸고 눈을 꿰매 아무것도 못 보지만 모든 것을 보는 천 번 고조할머니. 살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원히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그저, 그렇게 사천 년 동안 다락방에서 살포시 잠들어 있었다. 오랜 세월 사하라의 모래와 먼지 속 거대한 무덤 안에서 평안을 누리다가 유럽 백인의 손에 의하여 꺼내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지고 여기서 도중에 빼내어져 난데없이 미합중국으로 항해를 해 이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리노이주 북부의 언덕 저택에 터를 잡은 존재.

  제일 중요한 세시. 가족 중 가장 예쁘고 특별한 딸로 지혜의 여신과 다름없다. 이 지혜를 위하여 가족 모두는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소중하게 다루어 원하는 만큼 자도록 배려하려 힘을 기울이는 존재. 거처는 다락방, 저택이 생긴 이후 연속해서 쌓이고 쌓인 먼지, 이 가운데서도 세월의 지혜와 감식안과 지난 세월의 경험을 함께했던 먼지들만 고인 속에서 잠을 자는 존재이면서 실체가 없다. 오직 영혼만이 남아 자유롭게 온 세상을 날아다니며 아프리카코끼리, 수염고래 등의 거대 포유류부터 짚신벌레나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물의 속으로도 깃들어 이들의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을 하고, 심지어 생각도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존재. 당연히 가족 가운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티모시. 저택의 개구멍받이. 어느 날 밤에 셰익스피어로 발을 싸고, 포의 어셔가를 베개 삼아 바구니 안에 든 채로 저택 앞에 버려진 아이. 저택의 키가 훌쩍 큰 아내와 그보다 더 훌쩍 크고 마른 남편, 그리고 리어왕이 젊었던 시절에 이미 늙은 모습이었을 법한, 식탁에 올리면 안 되는 수프만 끓일 것 같은 수염 난 노파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만, 거울을 가져다 대보니 모습이 비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남편이 자신들과 다른 존재라는 분명한 이유로 접수 거부 의사를 밝혔건만, 세상에 아내 이기는 남편은 없는 법이라서 키 큰 여주인이 거두어 아들로 삼은 천생 역사가, 기록자. 그리고 유일한 인간의 아들.

  이들이 시월을 맞는다. 핼러윈 전야. 세상 각처에 깃들다가 몇 년 만에 친척들이 다 모여 떠들썩한 잔치를 베푸는 시월의 저택. 이들 다 유령.


  유령은 어떤 존재인가. 유령 세시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있는 존재들은 장님일 뿐이지. 하지만 세월에 몸을 적시고 대지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나 영원을 상속하게 된 우리는, 모래의 강과 어둠의 냇물에 부드럽게 떠다니는 우리는, 수백만 년이 걸려 도착해 대지에 쏟아져 내리는 별빛을 알고, 겹겹이 쌓인 지층과 사암층 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날개 달린 파충류의, 백만 년만큼 넓고 단 한 번의 숨결처럼 얇은 날개를 가진 짐승의 골격 아래 영원에 감싸인 채 씨앗처럼 묻힌 영혼들을 찾아낼 수 있단다. 우리는 시간의 파수꾼이니까. 지상을 걷는 이는 오직 한 순간밖에, 다음으로 숨을 내쉴 때면 사라져버리는 그 시간밖에는 모르지. 움직이며 살아가기 때문에 지킬 수 없는 거란다. 우리는 어둠 속 기억의 낱알들이란다. 우리의 장례용 단지는 우리가 품고 있던 빛이나 박동을 멈춘 심장만을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우물을,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은 비밀의 공간을 감추고 있단다. 시간 속에 사라진 모든 죽음을, 인간이 새로운 육신이 살 거처를 마련하고 돌을 쌓아 계속 위로 올라갈수록, 우리는 계속 아래로 내려간단다. 황혼에 물들고, 밤의 어둠에 감싸인 채로. 우리는 계속 쌓아 나가며, 작별할 때는 항상 분별한단다. 4백억 생명의 죽음은 엄청난 지혜라고 생각하지 않니? 그리고 대지 아래 차곡차곡 보관된 그 4백억 개의 죽음이, 지금 살아 있는 이들이 삶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 책 속에서 미네르바 할리데이 양이 유령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꼽은 것들

   : <햄릿>, <크리스마스 캐럴>, <폭풍의 언덕>, <나사의 회전>, <레베카>, <원숭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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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8-16 09: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별 네 개 반은 없었다.

잠자냥 2021-08-16 10: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시월에 읽으려고 사두고 계속 미뤄지기만 …. ㅋㅋㅋㅋ 올해 시월에는 읽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설마 출근?!

Falstaff 2021-08-16 10:35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출근이라니요. 하우스 코너, 집구석입니다. 이를 빼야 하는데 치과도 놀더라고요. 심심해서 하나 올렸습지요.
근데 브래드버리, 이 양반 글이 좋더라고요. 대개 이쪽 작가들은 스토리로 승부하는 거 같은데, 오호, 그래서 단편집 하나 더 읽기로 결정했습니다. ㅎㅎㅎ

잠자냥 2021-08-16 12:24   좋아요 4 | URL
약간 낭만적이죠. 그래서 저도 좋아해요. ㅎㅎ

Falstaff 2021-08-16 12:58   좋아요 2 | URL
ㅎㅎㅎ 기대하고 있습니다!

coolcat329 2021-08-16 11: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화씨451 읽고 실망을 했는데...
레이 브래드버리는 단편에서 더 돋보인다고 들었어요. 이 책 재밌을거 같아요.
현대문학도 읽으실거죠? ㅋ


Falstaff 2021-08-16 12:06   좋아요 3 | URL
예. 현대문학에서 나온 단편집 읽을 겁니다! ㅎㅎㅎ

청아 2021-08-16 12: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저 분명 읽다가 멘붕이 와서(저에겐 잃.시.찾보다 난해했음)다시 펼치지 못했는데 폴스타프님 리뷰 읽고보니 재도전 하고 싶어지네요ㅋㅋ아무래도 캄캄한 밤 읽어봐야겠습니다.😊 (최근 공포영화 보다가 도시락통이 떨어져서 기겁했던 1인)

Falstaff 2021-08-16 12:56   좋아요 3 | URL
오, 그때 미미 님 컨디션이 별로였을 거라는 데 마넌 겁니다.
별로 어렵지 않고요, 심지어 글도 재미나게 잘 써요.
ㅎㅎㅎㅎ 그리고 무섭지도 않답니다.

초란공 2021-08-16 13: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 <화씨 451>을 먼저 봐서 원작은 더 재미있겠지라고 기대했는데 그건 아닌가봅니다. ^^

Falstaff 2021-08-16 13:30   좋아요 3 | URL
오... 영화를 못 봐서 뭐라 하기는 힘든데요, 책....은 뭐 그리 권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ㅎㅎ

mini74 2021-08-16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부터 제 취향인데요. 저 낫도 맘에 들고 ㅎㅎ

Falstaff 2021-08-16 20:16   좋아요 1 | URL
낫이 마음에 드세요? ㅋㅋㅋㅋ 엽기 미니님.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08-17 0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잉 귀신 유령 다 싫은데.... 어떡하죠? ㅠ.ㅠ

Falstaff 2021-08-17 08:5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간단합니다. 안 읽으시면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