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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M의 성생활 - 개정판
카트린 밀레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다가 간혹 작가나 등장인물이 다른 책을 이야기하는 일이 있다. 그러면 호기심이 생긴다. <카트린 M의 성생활>도 그래서 샀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이었을 거란 짐작만 할 뿐. 저자 카트린 밀레는 우리나라에도 광주 비엔날레 등의 강연을 위해 두 번 방문했고, 이 책 말고도 다른 저작 두 권이 번역되어 나와 있다. 이이의 직업은 작가, 미술비평가, 큐레이터, 현대미술과 설치미술을 다루는 잡지 “아트 프레스”의 설립자이자 편집인. 이 정도면 알라딘 MD 최성혜의 말마따나 “뭇남성들이 만만하게 씹어댈 수 있는 여성이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써서 책으로 내도 말이지. 이왕 알라딘 MD의 말을 인용했으니 하나만 더 따보자.
“결단코, 그녀는 타자와의 성경험을 이야기한 것이지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접촉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얼핏 읽으면 밀레가 레즈비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텐데, 책 속의 카트린은 비록 여성을 애무해본 적은 있어도 확실히 이성애자다. 그러니 ‘타자’는 99% 이상 남성이라서, 남성과의 성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럼 뭐야? 성경험이지만 신체적 접촉은 아니라고? 가장 농밀한 신체적 접촉이 바로 섹스, 성 경험 아닌가? 소위 말하는 물·빨과 부르르한 집중력의 시간. 카트린의 주장에 의하면, 남자들은 “자기 정말 내 거 원하지? 대답해봐.” 또는 “날 불러줘. 어서, 날 불러줘.”라면서 흔히들 자기(이름)들과 자기들의 성기를 요구해달라고 주문하는 반면, 여자들은 “내 밑이 빠져버리게 해줘.”나 “다시! 아, 날 괴롭혀줘!”하는 식으로 자기들을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는, 오르가슴에 이르는 과정이 신체적 접촉이 아니라니, 거 참.
그래, 그래. 뭘 말하고 싶은지 안다, 알아. 포르노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외설이라고 보지 말라는 뜻이잖아. 카트린 밀레 역시 위 문단에 쓴 것처럼 오르가슴에 달한 남자와 여자의 멘트는 사람들이 과도하게 영화 또는 영상물을 본 결과가 아닐까 의심한다. 카트린 자신은 쾌감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이런 영화나 외설, 포르노의 경험에 의한 연기나 이 비슷한 것이 재현될 자리가 없어지면서, 드디어 오르가슴에 도달했다하면, 골반을 놀리는 것은 물론이고 다리와 팔도 움직여 마치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듯 발뒤꿈치로 파트너의 엉덩이와 넓적다리를 반복적으로 때리기도 한단다. 아이고, 놀래라. 도대체 쾌감이 얼마나 크면 카트린이 가장 좋아하는 소위 남성상위 자세에서 발뒤꿈치로 상대방의 엉덩이를, 그것도 반복적으로 때릴 수 있을까? 아니, 아니. 어떻게 해서, 왜 난 평생 단 한 번도 엉덩이나 넓적다리를 발뒤꿈치로 걷어 채여본 적이 없는 건가, 자괴감이 든다. 그놈의 자괴감이.
근데, 나만 그래? 당신이 남성이라면, 정말로 아내나 애인의 발뒤꿈치로 엉덩이나 넓적다리를 두드려 맞아 봤는지 묻고 싶다. 아이들이 어려서 함께 방을 쓰는 경우, 예전에는 집집마다 거의 다 그랬는데, 대개 엄마, 작은 애, 큰 애, 아빠의 순서로 잠을 자다가 애들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잠잠해지면 엄마나 아빠가 못 이기는 척 슬쩍 몸을 옮겨 서로를 만지다가 이윽고 관계하고, 기분이 삼삼해지는 듯하더니 한고비 올랐어도, 과연 엄마의 발뒤꿈치가 아빠의 엉덩이를 내리칠 수 있을까? 아이들 옆에서? 카트린이 이 책 301쪽에 썼듯이, 생각 외로, “오르가슴의 순간에 많은 남자들은 아주 차분한 표정을 보여준다.” 경험이 증명하는 내 생각에도 그렇다. 뭐 표정이야 어떻게 얼굴을 구기든지 그건 다음 문제로 하고 말이지. 제목 그대로 섹스는 정상인의 생활이다. 성‘생활’이라잖아.
열여덟에 성생활을 시작한 카트린은 처녀이기를 그만두고 몇 주 후에 파르투즈, 즉 세 사람 이상이 함께 하는 섹스 파티에 참석해보고 빠른 속도로 ‘파르투즈의 거장’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처음 경험했던 파르투즈에 함께 했던 남자 셋과 여자 둘 모두가 임질에 걸려, 여성은 증상이 늦게 발현되는 관계로 파트너 가운데 한 명이었던 앙드레가 사실을 재치있는 편지글로 써서 보냈고, 그걸 엄마가 읽었으며, 결국은 이미 열여덟 살이 됐기도 하고 했으니 이 김에 그냥 독립해버린다. 한 명의 여자가 같은 자리에서 몇 명의 남자와 교접을 할 수 있는가, 라고 하면 이 질문 자체를 매우 모멸적으로 받아들일 사람도 있겠지만, 자신이 경험했던 섹스와 남자의 수를 1부에서 먼저 밝히고자 했던 카틀린 M은, 한 번의 파르투즈에서 백 명에 가까운 콘돔 미착용 남성과 섹스를 한 적도 있다고 말한다. 이건 미친 짓 아닌가? 임신은 필을 복용해 예방했다고 쳐도, 인유두종 바이러스를 비롯한 치명적 감염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이지 싶다.
하여튼 이런 무수한 경험을 거치고, 어느덧 나이도 중년에 이른 카트린은, 드디어 섹스 중에 방귀를 뀌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건 물론 서슴없이 방귀를 뀌고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을 정도의, 거의 모든 성적 기교에 통달해 이를 능가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서 그렇다고? 천만의 말씀. 조금 전에 이야기했듯이, 섹스도 방귀와 마찬가지로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일 뿐이라서, 생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생활의 한 장면을 따 와 그것에 무수한 가필과 연출을 넣어 과장하는 일련의 지루한 일을 우리는 포르노라고 부른다. 카틀린 M은 자신이 겪어온 생활 자체를 그대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에세이가 되고 한 시절의 문제작이 되고, 무수한 판매 부수 덕에 돈벼락을 맞을 수 있었겠지. 그렇겠지. 나도 인정한다. <카틀린 M의 성생활>은 포르노가 아니다. 심지어 외설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포르노가 아니더라도 자극적인 건 자극적인 거고, 드러운 건 드러운 거다. 보수 없이 콘돔 미착용 남자 수십 명의 정액을 한 몸에 받아들이는 일, 임신을 피하기 위해 배란기에는 생식기 대신 소화기를 사용하는 행위 등을 과장 섞인 감탄사를 쓰지 않고 “지성적이고 가차 없으며 비범하게 솔직한” 서술을 했기 때문에 멋있다고 하기는 힘들다. 지성적이고 가차 없는 섹스의 묘사를 읽는 독자의 대뇌 역시 포르노를 읽을 때와 비슷하게 열심히 장면을 그리고 있음에야 말이지. 뭐라? 내가 속물이라서 그렇다고? 뭐 그럴 수도 있고.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가끔은 완전히 까발리지 않는 은밀한 즐거움이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라서.
이 책을 썼을 때가 카트린의 나이 54세. 같은 나이의 남자가 썼으면 어떤 내용이었을까?
젊어서는 하도 빨리 끝나는 거 같아서 그걸 좀 늦춰보려고 섹스 중에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외우거나 구구단, 태정태세문단세 또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는데, 나이가 드니까 물건 죽기 전에 얼른 끝내려고 아무 생각 없이, 딴 생각하면 죽는다, 딴 생각하면 죽는다, 작업에만 열중하게 된다고?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