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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가는 길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20년 9월
평점 :
2백 쪽에 불과한 노벨라 혹은 경장편. 그래도 읽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다 꼽아 읽느라고 그랬다. 어디서 들었다. 문단은 작가의 지문fingerprint이라고. 존 버거의 책은 처음 읽는다. 그래서 이제 독특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의 페이지 모서리마다 나의 진짜 지문을 맞추었다.
한 줌 눈이면 훌륭하지
여름의 열기에 힘들어하는 남자의 입에는
봄바람이면 훌륭하지
항해에 나서려는 선원들에게는
홑겹 이불 하나면 그 무엇보다 훌륭하지
침대에 누운 두 연인에게는
이렇게 <결혼식 가는 길 To the Wedding>은 시작한다. 이어서 등장하는 이는 사람들에게 양치기라는 뜻의 ‘초바나코스’로 불리는 맹인 사내. 광을 낸 검은 색 구두와 카우보이모자, 화려한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넥타이를 매 보석상 같은 차림을 하고 그리스 작은 도시의 시장에서 성구聖具의 일종인 타마타를 파는 인물. 이이에게 지난 부활절 일요일 오전에 프랑스에서 온 철도원이 딸과 함께 와서 심장이 그려진 양철 타마타를 산 적이 있다. 딸의 이름이 니농, NINON 또박또박 알파벳까지 일러준 부녀. 니농이 수제 샌들에 관심을 두어 아버지에게, 새 샌들이에요, 오랫동안 신고 다녔던 것 같아요. 어쩌면 결혼식 때 신으려고 산 건지도 몰라요. 열리지 않았던 그 결혼식이요.
이때까지 독자는 이 장면에서 철도원과 딸 니농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타마라를 파는 맹인처럼. 그러다 갑자기 화면은 몇 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 철도원과 고물상을 운영하는 페데리코의 만남. 화요일에 있을 니농의 결혼식에 쓸 샴페인을 몇 상자 주문하는 아버지.
철도원은 프랑스 쪽 알프스산맥의 모단에 있는 방 세 개짜리 집에 사는 2급 신호수, 장 페레로. 이탈리아 베르첼리의 벼 생산지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아들이다. 야근에 조합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여가가 별로 없어서 26년 전에 첫 아내 니콜은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났다. 이후 그르노블의 체코 이민자를 위한 모임에서 즈데나를 만나 오토바이를 타고 함께 여행을 하는 등 친밀하게 지내다 딸 니농을 낳았다.
즈데나는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쑤시는 왼손 손가락으로 지하주차장의 정교한 설계도를 그리고 있다. 25년 전인 1968년 8월 20일에는 프라하의 학생으로 바츨라프 광장 시위에 참석해 “프라하의 봄” 가운데 작은 목소리를 보탠 적이 있으나 결국 정부와 소비에트의 탄압을 이기지 못해 1969년 성탄절 날에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갔다가 파리로 이동한 여인. 딸을 출산하고 니농이 6살 때, 체코에서 인권·시민권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다녀올 줄 알고 8년 만에 귀국했다가 그대로 브라티슬라바에 눌러앉았다. 물론 그동안 몇 번 니농이 엄마를 만나러 온 적이 있기는 하다. 어느날 이이의 아픈 왼손 손가락 사이에 들린 버스표는 브라티슬라바-베네치아, 라고 쓰여 있었다. 딸 니농의 결혼식에 가는 길.
2급 신호수 장 페레로는 언제나 그렇듯이 오토바이를 몰고 홀로 결혼식이 열리는 곳, 포강 하류의 작은 마을 고리노까지 달린다. 빨간 혼다를 타고. 즈데나도 그렇고 장도 그렇고, 딸의 결혼식에 가는 마음속에 어쩔 수 없이 담겨 있는 큰 슬픔. 니농의 혈관에는 HIV 바이러스가 퍼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곧 죽는다. 심지어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1917년 12월 프랑스 모리엔에서 그랬듯이. 8백 명의 젊은 군인들. 전쟁 중 크리스마스 휴가를 받아 기차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가다 객차 안에서 만취한 상태로 탈선된 객차에 깔려 죽기도 한다. 그러나 니농이 그들과 다른 것은 스스로 언제 어느 형태로, 어느 정도의 고통을 느끼며 죽어갈 것을 알고 있다는 것.
니농을 사랑하는 중고 옷 장수 지노. 1993년의 이탈리아에서 HIV 보균자를 바라보던 시선. 비슷한 시기에 미국 고속도로의 쇼핑몰 주차장에서 건달들이 보균자를 바라보던 시선(무라카미 류, <교코> 참조), 역시 당시 HIV 보균자임을 숨기고 매춘하던 커피 배달 아가씨를 보던 한국의 작은 읍, 면, 동 주민들의 시선. 매우 유사하다. 저주와 기피와 공포와 죽음을 연상시키는 모진 눈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든 고물상 주인 페데리코 씨는 지노에게 조언한다.
“옛날 사람들은 금속이 땅 밑에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믿었다. 모든 금속이 말이야. 수은과 황이 섞이면서 만들어진다고 했지. 지노, 그 아가씨랑 결혼해라. 너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한 여인과 결혼하는 거야. 고철이 곧 쓰레기는 아니다, 지노. 그 아가씨랑 결혼해.”
이렇게 해서 지노와 니농은 장 페레로, 즈데나 흘레체크, 니농과 가장 친한 친구 마렐라를 포함한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지노가 직접 잡은 20킬로그램짜리 농어와 지노의 아주머니 에마누엘라가 요리운 장어와, 로베르토 아저씨가 구운 어린 양 구이를 곁들인 성대하고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저 먼 곳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중년의 한 남자가 니농을 보며, 꼭 무슨 창녀 같네, 쌍년! 이라 욕설을 퍼붓는 것도 모르고 니농과 지노는 광기(craziness), 속임수(cunning), 보살핌(care), 3C의 결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몇 년 후.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쇠약해진 니농은 아버지 장 페레로의 부축을 받아 예전엔 습지였지만 지금은 시장이 열리는 그리스의 플라카 주변 구역에 있는 교회당 앞에서 마치 시장major처럼 옷을 잘 차려입은, 양치기라는 뜻의 초바나코스라고 불리는 맹인한테 심장이 새겨진 양철 타마타를 하나 구입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하지만 이야기 말고 문장과 문단을 읽으면 독자들은 페이지마다 쉽게 넘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리라. 책을 읽으면 저절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버릴 문장이 없다는 것. 하나도 헛되이 자리를 차지한 것이 없다. 이렇게 절약하고 절약한 언어로 사랑과 상실과 아픔과 잠깐의 희열과 죽음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