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 알베르토 모라비아 Alberto Moravia 시리즈 1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본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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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들의 높은 평가가 아니더라도 ‘경멸’이란 제목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선택했을 것이다. 격렬하면서도 매력적인 단어 아닌가, 경멸.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베니스 출신 유대인 건축가의 아들로 로마에서 태어나 병약한 청소년시기를 보내고 주로 시나리오를 쓰면서 30대를 지내는데, 이 때 영화 <율리시스>의 제작에 함께 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경멸>이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을 경험담이라고는 할 수 없고, <율리시스>를 만들면서 친구이자 소설가, 영화감독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율리시스>의 감독이자 스스로도 대본작가였던 마리오 카메리니와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현대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토론했던 걸 자료로 쓰지 않았을까 싶다.

 

  에밀리아와 리카르도 몰티니는 결혼하고 2년 동안 완벽한 신혼시절을 보낸 젊은 부부. 리카르도가 작품의 화자 ‘나’다. 리카르도는 극작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맹렬한 습작의 시기를 보내면서 신문사에 영화평론을 쓰거나 다른 잡문을 기고해 쥐꼬리만 한 원고료를 벌어 생활을 해왔다. 그러니 좁은 원룸에서 얼마나 춥고 배고팠겠는가. 로마라서 그렇게 춥지는 않았을 거라고? 눈 밝은 독자들아, 그냥 좀 넘어가자. 하여튼 이들은 가끔 비누나 화장지 같은 생필품을 살 푼돈이 부족할 지경을 당하기도 했지만 서로의 사랑으로 역경을 이겨나가며 힘든지도 모르고 산 세월이었다. 나도 비슷한 신혼을 지내봐서 이해한다, 이해해.
  그런데 리카르도가 보기에 착한 아내 에밀리아는 유난히 집에 대해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 가난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중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공부를 작파한 채 돈을 벌기 위해 타이피스트로 일했던 에밀리아는 유독 집 없는 설움을 많이 탔다. 그래 ‘나’ 리카르도는 아파트를 분양받기로 결정을 하고 2년 동안 모아둔 돈과 대출을 받아 에밀리아 이름으로 계약으로 해 첫 중도금을 지불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곧바로 두 번째 중도금을 어떻게 마련할까, 하는 고민으로 눈꺼풀 아래가 거멓게 변해버렸다. 바로 이때 등장한 인물, 영화 제작자 바티스타의 의뢰로 시나리오를 집필하게 되고 생활이 좋아져 두 번째 중도금은 물론이고 소형이기는 하지만 마이카의 꿈도 이루게 된다.
  그래 바티스타가 ‘나’와 에밀리아를 초대하여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2차로 자기 집에 가서 술 한 잔씩 하자고 제의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직 자동차를 사기 전이라) 2인승 비싼 스포츠카로 자기가 먼저 에밀리아와 함께 가 있을 테니까 ‘나’는 택시를 타고 쫓아오라고 제안한다. 맨살이 드러나는 단 한 벌뿐인 검정 드레스를 입은 에밀리아는 불안이 깃들고 몹시 불편해 보였으나 ‘나’는 바티스타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해 그의 뜻대로 하게 하는 일이 생긴다. 어쨌든 이리하여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부부는 아직 완공하지 않은 자기 아파트를 보러 갔다가 먼지 쌓인 벽돌 바닥에서 어느 때보다 폭풍같이 격렬하고 기묘한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뜨거운 사랑이었음을.
  얼마 후, 바티스타는 ‘나’에게 독일에서 온 유명 영화감독인 레인골드(Rheingold: ‘라인의 황금’이란 뜻의 ‘라인골트’를 이탈리아식으로 발음한 것일 듯)를 소개하고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영화화할 예정이니 레인골드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라고 일을 준다. 계약서와 즉각 선수금까지 건네주면서. 그러면서 아내 에밀리아와 함께, 작가 모라비아 스스로가 탄압을 피해 1940년대 초를 견뎌냈던, 카프리 섬에 있는 자기 별장에 가서 시나리오 작업을 할 것을 제의하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수긍해버린다. 일단 피렌체까지 가는 도중에도 바티스타는 에밀리아와 함께 차를 타고 가고, 에밀리아는 이번에도 매우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호소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바티스타의 뜻에 따르게 된다.
  이 과정에 ‘나’ 리카르도와 에밀리아 사이에는 지난 2년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간극이 생겨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음을 확인한다. ‘나’는 에밀리아의 집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극작가로의 꿈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에밀리아는 ‘나’의 집에 대한 욕구 때문에 시나리오 작품을 쓰게 되고 이 와중에 자신에게도 마땅하지 못한 일을 시킨다고 생각한다.
  오직 자기중심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멍청한 ‘나’ 리카르도는, 독자들이 벌써 알고 있는 이유 때문에 아내 에밀리아로부터, “나는 너를 경멸해.”라는 더 이상 모욕적일 수 없는 말을 얻어 처먹고 만다. 이 책이 320쪽까지인데, 리카르도는 그걸 285쪽에 와서야 거의 이거 아닐까 짐작을 할 정도니까, 둘 가운데 하나다. 리카르도가 저능아든지,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소시오패스든지.
  여기에 책의 중간 부분인 12장부터 등장하는 레인골드의 별 색다르지 않은 <오디세우스>의 현대적 해석을 가져와 율리시스-페넬로페의 관계를 지식인-평범한 여인, 아내를 사랑한 남자-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아내 등으로 대척점에 있는 부부관계를 설정하면, 이걸 리카르도는 ‘나’-에밀리아의 관계에 대입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또 당연히 레인골드의 해석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진행한다. 근데, 말은 똑바로 하랬다고, 도대체 이게 뭐가 중헌디?

 

  재미없는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중요한 주제는 왜 아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걸 넘어 경멸한다고까지 말한 정도가 되었을까 하는 것. 그걸 다 큰 사내새끼가, 얼마나 징징대는지, 아이고 징그러워라. 남자는, 공부하고 글 쓰는 거 말고, 적어도 인간관계 특히 부부 심리학에 관해서는 백치에다가, 여자는 남편한테 찍소리 한 마디 안 하다가 문제가 곪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 가서야 그냥 뻥, 터뜨리고 마는 남성 의존형 인간이다. 왜 진즉에 하루 날 잡아 너, 이리 좀 와봐. 해놓고 따따부따 하지 못해 이 사달을 만드느냐고. ‘나’, 리카르도는 결국 아내 에밀리아가 왜 자기를 경멸하는지 알았다가 다시 자신의 뜻대로, 자기 편한 쪽으로 해석한 채 결말을 맺게 된다.
  그리고 리카르도의 심성보다 더 역겨운 마지막 장면. 어떤 씬인지 치명적 스포일이라 얘기는 못하겠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학적 해결 방법으로 싸놓은 거 닦았다는 말만.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 내가 알던 그 사람 맞나? 맞다. 읽기 전부터 알았다.
  ㄷㄹㅂ 님은 읽지 마시기를. 혈압 터져 일찍 먼 길 가시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내가 다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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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7-19 09: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폴스타프 님 주구장창 징징대는 커플 *경멸* ㅋㅋㅋㅋ ㄷㄹㅂ 님 읽게 해보고 싶네요. ㅋㅋㅋㅋ

아, 뭐예요 마지막에 자살(죽음)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Falstaff 2021-07-19 09:34   좋아요 2 | URL
읽으셨남요?
글쎄 이 책이 워낙 좋은 독자평을 즐기고 있어서 돈과 시간을 들여 읽지 마시라는 말씀은 못 하겠고, 거 참.
하여튼 이런 내용은 제가 제일 경멸하는 플롯입니다! ㄷㄹㅂ 님은 정말 읽으시면 안 됩니다. 부들부들... ㅋㅋㅋㅋ

잠자냥 2021-07-19 09:54   좋아요 2 | URL
아니요, 저는 안 읽었습니다. ㅎㅎㅎ 안 읽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 2021-07-22 21:39   좋아요 0 | URL
잠자냥 님 가학적 성향이 있으신 겁니까?! 😱

잠자냥 2021-07-22 22:09   좋아요 0 | URL
다부장님 제가 좀….?!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7-19 1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스타일이 좋던데 역시 폴스타프님은 화끈하신거 같아요 😎

Falstaff 2021-07-19 10:44   좋아요 3 | URL
아오, 전 내내 지겹게 읽다가, 마지막 충격적인 결말 때문에 완전 빡쳤습니다.
근데 너그럽게 생각하니 아예 처음부터 영화를 위한 소설로 쓴 거 같아서 그나마 별점 하나를 더 보태준 겁니다.

결국은 어떤 작품이든지 재미나게 공감하며 읽은 사람이 제일 좋은 겁니다. 어차피 취미생활일 뿐인걸요. ㅋㅋㅋ

독서괭 2021-07-19 1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지 말라고 하시는데 읽고 싶어지는 이 리뷰 뭐죠? ㅋㅋㅋ ㄷㄹㅂ님의 반응도 궁금해요 ㅋㅋ

Falstaff 2021-07-19 10:50   좋아요 2 | URL
흑흑흑... ㄷㄹㅂ 님만 읽지 마시라 했어요.
다른 독자들 리뷰가 워낙 좋은 거에 쫄아서 마음과 달리 읽지 말라는 말은 차마 못했답니다.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07-20 02: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 올해 제가 읽은 책 중에서 찌질남 1위에 등극한 남자 주인공입니다.
모라비아는 혹시 이 책의 주인공에 당대 이탈리아의 지식인의 모습을 대입한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진짜 센세이셔널 했을것 같기도 하더라구요. 이게 우리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면서 항의가 빗발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얘기는 없더군요. 그냥 사랑얘기로 본다면 저도 비추천입니다.

Falstaff 2021-07-20 08:42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반갑습니다!!!
둘 다 답답한 젊은 부부입니다만 남자 쪽이 더 찌질해서 읽는 내내 고구마도 아니고 급성 변비 걸릴 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7-22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으면서 수천번 쌍욕할 것 같긴 하지만 어쩐지 읽고 대차게 까는 리뷰를 쓰고 싶기도 하네요 ㅋㅋ
그나저나 줄거리는 데미 무어 주연의 영화 <은밀한 유혹> 생각나게 하네요. 그 영화도 뭥믜 스러웠는데.. 사람들 왜 죄다 그렇게 바보같은 선택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개그우먼 김신영이 꽁트 하면서 했던 대사인데,
“너도 바보 선배도 바보 다 바보다!”
생각나네요. 아 속터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23 08:54   좋아요 0 | URL
ㅋㅋㅋ 여러가지로 안 읽으시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한여름 삼복 더위엔 더욱 그렇습지요. 절대 속 안 터지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7-24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사람 다 짜증 답답했지만 저는 참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
그래 너 이리와봐라. 따따부따! 이걸 왜 못하는지 그게 참 답답해서요...ㅋㅋ

Falstaff 2021-07-24 21:02   좋아요 1 | URL
특히 서재 동무님들께서 좋다고 하신 책을 이렇게 후지게 이야기하는 데에는 조금쯤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아마 이해하실 듯. ㅋㅋㅋㅋㅋ
뭐 사는 게 다 그렇지요.
그나마 타협하느라 별점 하나 정도는 더 올라갔을까요? ㅎㅎㅎ 저도 몰겄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