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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희곡우체통 낭독회 희곡집 ㅣ 국립극단 희곡우체통 희곡집
이유진 외 지음 / 걷는사람 / 2021년 3월
평점 :
먼저 “희곡우체통.”
우리나라 국립극단이 2018년부터 좋은 희곡을 발굴하기 위해 온라인을 통해 희곡을 상시 모집하고, 이 가운데 빼어난 작품을 발굴해 상금은 못 줄망정 낭독회를 열어주는 행사라고 한다. 국립극단의 희곡우체국장 김명화는 연초부터 COVID-19가 덮친 2020년을 저 옛날 역병이 창궐했던 오이디푸스 왕 치하의 테베와 비교해가며, 관객과 대면해야 진정한 생명을 얻는 연극 역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는데 이 와중에 예전에 비하여 양은 적지만 질적으로 풍성한 작품들을, 거리두기 또는 온라인 무관객 낭독회로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아쉬워했다.
참 좋은 제도다. 올해 초까지 주로 중국의 현대 희곡을 집중해서 읽을 기회가 있었고, 중국 현대희곡의 높은 수준에 호기심이 생겨 우리나라 현대 희곡에도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일종의 의무감 비슷한 감정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희곡우체통”이라니. 참 예쁘장한 이름의 공모제도. 상금 백만 원보다 자기가 쓴 희곡이, 비록 무대장치와 분장, 연기는 없더라도 진짜 배우들에 의하여 무대 위에서 낭독된다는 것이 훨씬 더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물론 상금도 주면 금상첨화지만. 하긴 국립극단 예산이 얼마나 된다고.
책 뒤, 우체국장 김명화의 작품해설은 우체국에서 선정한 작품들에 관한 내용이니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당연하겠다. 나는 내 돈 주고 사 본 책이니 내가 감상한 바를 솔직하게 쓸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우리의 현대희곡을 읽어본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기대 이상이다.
단, 조건이 있다. 이 책에 실린 작품을 쓴 극작가들은 거의 대부분 신인이거나, 심지어 데뷔작이라 거장 극작가들의 작품과의 수평비교는 하지 말자. 심지어 전에 읽은 중국현대희곡 작품들과도 비교하면 안 될 것이, 중국희곡을 쓴 극작가들은 몇 번의 해외공연도 해 봤을 정도로 이미 중국 연극계에서 뼈가 굵어지고 몸집마저 불린 베테랑들이라는 점. 즉, 이유진 외 다섯 명의 극작가들의 체급과 비교해 말하자면 기대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대개 문학행위 가운데 아방가르드를 선도해가는 장르가 드라마, 희곡 아니었나? 그래서 우리 희곡작품을 고를 당시, 일단 한 권을 읽어보고, (현대)연극의 전위성 정도를 내 머리로 접수 가능하면 더 찾아 읽겠다, 해서 딱 한 권을 산 것이 아쉽다. 이왕 구입하는 김에 2018년과 2019년 희곡집까지 한 번에 들여왔으면 더 좋을 뻔했는데. 우리나라 문학의 아방가르드는 단연 시가 이끌고 나가는 것 같다. (물론, 제발 좀, 지금보다 훨씬 적은 수의 시인들이 그들의 아방가르드 리그를 벌였으면 좋겠지만.) 그리고, 내가 읽어본 현대희곡이 중국에 국한한지라, 중국의 작품과 비교해도 실험적인 작품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아직은 실험적인 작품으로 주목을 받기 쉽지 않은지도. 그래서 저절로 우리 희곡은 읽는 사람들 편하게 생활 이야기도 있고, 가까운 미래의 디스토피아로 보는 휴머니즘도 있고, 심지어 성종임금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 사약을 받는 윤씨 이야기도 있으며, 저 유명한 체호프의 작품 뒷얘기를 꾸며낸 것뿐만 아니라, 아예 낭독극을 전제로 한 듯이 보이는 해체적 실험극도 하나 있고, 1960년대 후반의 개발독재 시절을 그린 것도 있다. 한 마디로 다양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다른 작품들보다 더 좋아서가 아니라 단지 제일 먼저 실렸다는 이유로 이유진의 <X의 비극>을 소개한다. 제목의 ‘X’는 사람 이름이나 이니셜, 별명이 아니고 X세대, X 제너레이션을 뜻한다. X세대는 원래 캐나다 작가 더글러스 쿠플랜드가 1960년대에 태어난 세 명의 젊은이를 칭했으나, 이제는 소위 ‘신세대’를 일컫는 말로 굳어졌다. 이 작품에서 X세대는 2010년대 말에 40대에 이른 과거의 신세대. 한때는 신세대였으나 이젠 세상이 빛의 속도로 변해가는 걸 눈 번히 뜨고 바라보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속도에 맞추지 못해 도무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공포에 휩싸인 샌드위치 세대를 상징한다.
주인공 강현서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쉬지 않고 경쟁과 노력과 능률의 톱니 사이에서 이젠 번-아웃된 상태. 이제는 자신이 조직에 기여하는 이익보다 받아가는 급여가 더 많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고, 더 이상 경쟁의 칼날 위에서 중심을 잡고 있기도 진저리가 나, 마치 그레고리가 하루 날 잡아 딱정벌레로 변해버렸듯이 어느 날 자리 깔고 자빠져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기 커리어를 포기하고 출산과 육아를 해온 경력단절여성 아내 안도희는 기껏 해야 최저시급을 받으며 식당 일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입시를 코앞에 둔 고2 아들 강명수는 수학 과외비를 제때 내지 못하는 것을 쪽팔려 불평하고, 안도희는 남편의 죽마고우이자 의사이자 이혼남인 박우섭과 내연의 관계를 맺는 대가로 아들의 과외비를 벌어온다.
현서의 늙은 어머니 70대 안영자는 외아들 현서를 자리에서 일으키기 위하여 자신의 작은 집을 팔아 돌팔이 중에게 전 재산을 시주해서 부적 한 장을 얻어오고, 아내, 친구, 아들은 가장의 역할을 계속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지만, 안타깝게도 강현서는 완전히 번-아웃. 급기야 가정은 완전히 해체되고 현서는 아들의 20대 아가씨 수학과외선생인 윤애리의 제안에 따라 모종의 둘 만의 의식을 치루려 한다. 물론 몸의 관계는 아니다. 번 아웃되어 자리보전을 하는 남자가 그럴 수는 없을 테니.
여섯 명의 극작가들을 검색해보았다. 인터넷에서는 이들의 자료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극작가 이름을 차례로 소개한다.
이유진(2007년 등단), 박세은(데뷔), 박지선, 김수연(첫 장편희곡), 강동훈(데뷔), 홍단비. 이들의 건필과 (기필코!) 성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