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들마치 - 완역본
조지 엘리엇 지음, 이가형 옮김 / 주영사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은이 조지 엘리엇. 역자 이가형. 이이로 말할 거 같으면 1921년 목포 출신으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당대’의 인재라고 해도 마땅할 것이다. 이후 목포고등학교, 전남대, 중앙대, 국민대 교수를 거친 후 2001년에 천국의 기쁨을 찾아갔다. 책 <미들마치>는 1990년 금성출판사에서 두 권짜리로 나온 것을 저작권자인 유족들의 허락 하에 주영사가 2019년 출판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 완역본이 출간되기를 말 그대로 ‘목이 빠지게’ 기다렸기 때문에 완역본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바로 그 순간, 생각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냉큼 사서 읽게 되었다. 역자가 고인이 된 후 18년이 흘렀고, 번역을 해 출간을 한 것은 벌써 30년 가까이 지나, 이번이 사실상 첫 중판일 텐데, 그간의 세월을 벌충하느라 출판사 주영사 편집부에서 각고의 노력을 보태 옛 표현이나 단어 같은 것을 요즘 방식으로 바꾸었으리라고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런데, 가격이 58,000원. 10% 할인가가 52,200원.
 나처럼 조지 엘리엇에 환장을 한 독자가 아니면 선뜻 접근할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겠다. 나도 떨리는 손가락으로 구매 버튼을 클릭했음을 고백한다. 좋다. 그럴 수 있다. 이거 한 권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조지 엘리엇의 작품 가운데뿐만 아니라 영국이 유사 이래 생산해낸 최고의 '소설'작품으로 선정된 <미들마치>를 읽고 싶으면 비싸더라도 5만원이 넘는 돈을 내고, 싫으면 안 읽으면 된다. 하지만 확실한 건, 52,200원을 주고 산 독자,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상품의 구매자는 당.연.히, 가격에 어울리는 품질을 기대한다. 책이 아무리 1,416쪽에 이르고 무게가 돼지고기 세 근 반이 넘는 2,124그램에 달해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읽으려면 손모가지 결딴날 정도의 두께, 즉 하드웨어를 자랑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나도 출퇴근 시간에 차량 안에서 읽으려다가 하루 만에 포기했다. 손모가지는 두 번째고 팔뚝 근육이 뭉쳐 며칠 동안 불편하게 지내야 했으니. 어쨌건, 품질, 내가 말하는 품질은 책의 두께와 무게와 장정과 디자인과 글자체와 글자 크기 및 자간, 행간 간격 같은 것이 아니라 정확한, 물론 가격에 합당할 만큼의 정확한 문장으로 만들어진 우리말 <미들마치>다. 이번에 새로 완역한 것이 아니라 무려 30년 전에 번역한 작품을 ‘재벌구이’ 해 52,200원 받고 팔아먹기 위해서라면 주영사 사장과 편집부장과 편집부 직원들은 더 세밀한 작업을 했어야 한다. 특히 동음이의어로 읽을까 걱정스러워 한글 뒤에 괄호를 치고 한문으로 보충 설명을 하는 작업은 쉽게 하면 안 된다. 굳이 괄호 속 한문으로 보충하지 않아도 흐름 상 뜻을 충분이 알 수 있는 경우에, 바로 그 한문 보충, 잘못 쓴 한자 때문에 오히려 뜻을 잘못 알아들어 쓸데없이 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등 진도가 막히는 일도 있고, 아예 음가가 다른 한자를 괄호 속에 넣어 읽는 사람을 실소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원소주기율표 원자번호 15번인 인(P:燐)의 한자어가 燒냐? 燒 는 불탈 ‘소’자다. 내가 다른 한자는 몰라도 천국에 이르는 액체 ‘소주’ 할 때의 소자가 이 燒자인 건 확실하게 안다. 적절하지 않은 교정, 교열도 다른 출판사의 (비싸지만 이 책과 비교해)상대적으로 저렴한 책보다 나은 점이 없다. 1,416쪽. 본문은 1,413쪽에서 끝난다. 책 뒤에 흔한 역자 해설도 없고(역자가 죽었으니 당연한 건가?) 작품론 같은 것도 달려있지 않다. 52,200원짜리, 30년 전 번역의 ‘재벌구이’가 말이지.
 슬프다. 우리나라의 잘난 척하는 그 많은 출판사들 가운데 <미들마치>를 30년 동안 다시 완역해보겠다는 회사가 어찌 한 군데도 없었을까. 어떻게 독자로 하여금 몇 년을 목을 늘이며 기다리다 이런 책을 읽게 만들었을까.

 

 “그녀는 그를 향해, 과연 당신은 나에게 적합할 만큼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 스스로 가슴에 대고 물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당돌한 지시를 하는 게 아니라, 나야말로 커소번 씨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일까 하고 불안스레 스스로 가슴에 묻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소설의 주인공 도로시아 브룩, ‘그’는 도로시아와 앞으로 6주가 지나면 결혼하게 될 16세 연상의 약혼자이자, 국교회 신부이자, 거대한 자산을 유증 받은 부르주아, 신화학神話學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준비 중인 학자인 에드워드 커소번이다. 작품의 시간적 무대는 1829년이며,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글을 쓰는 시기는 40년 후이니까 1869년경. 19세기 초반, 아직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하기도 전이라, 여성의 큰 의무는 남자에게 복종하여 나서지 않고, 가정에서 안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게 관리하는 일에 국한했다. 따라서 결혼을 앞두고도 위에 인용한 것처럼 여자가 남자에게 ‘당신이 내게 적합한가요?’라고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내가 저이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을까?’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예의바르고, 종교적이고, 명예를 존중하고, 양심적이고, 이런 것을 다 합하여 (여성으로서) 시대의 정의에 충실한 도로시아 브룩 양의 태도였다.
 위의 인용문을 읽을 때까지는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던 여류 소설가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나갔는데, 여자는 남자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 몇 번 더 나오니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어라, 혹시 이거 반어법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엘리엇 자신이 남자 이름인 ‘조지’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당시 여성 작가들의 의식수준을 조롱한 것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고 많은 이름 가운데 여자 이름으로 ‘조지’가 뭐니, ‘조지’가?) 그러면서 이 책, 아니, 조지 엘리엇의 작품들, 그래봐야 읽어본 것이라고는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과 <다니엘 데론다> 말고는 없지만 하여간, 그 속에 초기 페미니즘, 페미니즘이랄 것까지는 없어도 젠더 차이에 관한 우열에 대해 상당할 정도의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처럼 읽혔다.
 이 책은 도로시아와 커소번 커플 외에도, 점점 쇠락해가는 기업가의 딸 로저먼드와 새로운 의술로 무장한 의사 리드게이트, 로저먼드의 남동생이자 낭비벽이 심한 프레드와 가난한 집안의 장녀 메리, 도로시아의 여동생 실리아와 미들마치의 유일한 준귀족 제임스 체텀 경, 이렇게 네 커플과 이들이 터를 잡고 사는 미들마치 시 주변의 조연들이 만들어간다. 주요 조연으로 괴팍한 성격으로 오늘 내일을 기다리며 죽음의 침상 위에서도 심술을 그치지 않는 큰 영지와 저택과 막대한 현금의 소유자 피터 페더스톤, 신실하지만 생계를 위해서 자그마한 카드 판에서 안면몰수하고 돈을 따내 생활에 보태는 따뜻한 마음씨의 페어브라더 신부, 부유한 은행가이자 작품의 큰 변곡점을 마련하는 불운한 과거의 소유자 벌스트로드 씨, 그리고 처음엔 초라했으나 나중엔 창대해지는 레이디슬로 씨가 등장해 도로시아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거의 모든 작품 속에서는, 특히 그것이 19세기 것이라면, 결혼과 동시에 ‘이들은 여생을 함께 행복하게 살았대요.’로 끝나겠지만, 조지 엘리엇은 이 의견에 관해 얄짤없이 냉소를 보낸다. 스스로 유부남과 사실혼 관계를 수십 년간 이어와서 그런지 몰라도 <미들마치>는 초장에 주인공인 도로시아가 두 명의 훌륭한 남편감으로부터 청혼을 받고 그중 하나를 골라 결혼해버리게 만들고, 조금 있다가 미들마치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가운데 한 명인 로저먼드와 유능한 의사 리드게이트도 충동적인 결혼에 골인 시킨 다음, 조지 엘리엇은 음흉한 미소를 입가에 띈 채 수백 페이지에 걸쳐 결혼이란 것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과 속박과 투쟁인지 리얼하게 묘사하기에 이른다. 엘리엇이 여성이라고 해서 이런 묘사들이 여성 위주로 되어 있지는 않다. 악당 역은 항상 타인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학자이자 신부인 커소번 씨와 미모에 관한 한 이견이 있을 수 없는 로저먼드, 이들의 이면에 감추어진 위선과 악의와 증오(커소번), 허위와 허례와 철없음(로저먼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상대 배우자들의 심적 갈등이 점차 악화되는 것까지. 조지 엘리엇의 소설 속에서 삶은 삶 그대로다. 사랑은? 사랑도 삶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하나 이상을 반대급부로 희생시켜야 하는 것. 만일 지금이 19세기였다면 나는 <미들마치>를 지금보다는 훨씬 더 열광하면서 읽었을 것이 분명하다.
 워낙 긴 작품이고, 번역문이 30년 넘은 오래된 문장이라 읽어나가는데 속도가 붙지 않는다. 이틀 읽어 400 페이지 좀 넘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시나? 아하, 아직도 천 페이지가 남았네. 힘들여 800 페이지 까지 읽고는? 아직도 600 페이지 남았어. 원래 내가 두꺼운 책을 좋아하지만, 이 책은 해도 너무했다. 꼬박 엿새 걸렸다. 근데 스토리가 재미있어 번역문에 익숙하게 되는 시점부터는 훌훌 잘 넘어가기는 한다. 읽어보시든지 마시든지 알아서 하시라. 10% 할인 가격이 52,200원임을 감안하셔서.

 

(표지의 붉은 부분은, 놀랍게도, 아니 아니, 일반적이지 않게도 광고용 '띠지'가 아니라 표지가 원래 그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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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1-1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책값은 많이 들어간 종이 때문인지
어쩐지 ㅇㅇㅇ 비싸네요.

그리고 번역은 새로 하지 않고 예전에
번역을 우리다니... 한국 출판계의 고질
적인 병폐라고 생각합니다.

후덜덜한 분량 때문에 도전할 생각조차
못하겠네요.

Falstaff 2019-11-18 12:06   좋아요 0 | URL
하긴 조지 엘리엇의 다른 번역물인 <다니엘 데론다>는 무려 네 권으로 분리해놓아서 10% 할인가가 84,000원에 달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새 번역이기라도 하지요.

slobe00 2019-11-19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벽돌책 좋아하지만 이 책은 절대로 누워서는 못 볼 두께였어요. 뚜벅이가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힘든 거대사이즈라 장바구니 담아뒀는데.. 에공 언젠가 새로운 번역 완역본이 나오기는 할까요?
서양 독서에세이류에 엄청 자주 등장해서 오랫동안 궁금했던 책인데(이 책과 픽윅 페이퍼스요..) 뭔가 참 아쉽기 그지없네요..

Falstaff 2019-11-19 09:00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 배낭 매고 가세요. ^^;;
제가 알던 유명 역자가 우리나라 유수의 출판사에 이 책의 번역을 제안했답니다. 근데 거절당했다네요. 시장성이 없다고 보는 모양입니다. 제가 읽기로는 심지어 제인 오스틴보다 좋고, 브론테 자매들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시야를 펼치는 책이고 작가인데, 암만해도 길이 때문에 출판을 망설이는 모양입니다.

coolcat329 2019-11-1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제목만 들어봤는데 정말 엄청난 양의 책이네요. 저도 영국인지 미국인지 어떤 서평가가 이 작품 호평하는 글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제대로 된 새 번역이 나오면 좋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19-11-19 20:18   좋아요 1 | URL
당분간은 번역 출판이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이런 책은 역시 도서관 이용이 아주 딱입니다.
엘리엇의 다른 역작 <다니엘 데론다> 역시 도서관 이용을 추천합니다. ^^

slobe00 2019-11-23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신 애덤 비드를 샀어요. 언젠가는 좋은 번역으로 미들마치 읽고프네요~

Falstaff 2019-11-24 10:40   좋아요 0 | URL
아, 그 책 사셨군요. 현대문화하고 나남 가운데 어느 책인지 궁금합니다.
미리보기를 하면 두 역자의 우리말 표현 방식이 재미있게 달라서 말입니다.
서평 기다리겠습니다. ^^

blanca 2020-12-20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 너무 읽고 싶어서 원서로 구입했어요. 그러나.... 정말 이건 번역본 없이는 힘들겠더라고요. 왜 이리 분권되고 현대화된 새로 번역한 이쁜 장정의 책은 안 나와 주는 걸까요? 아쉽습니다. 만약 독자 펀딩을 한다면 참가하고 싶을 정도예요.

Falstaff 2020-12-20 15:03   좋아요 0 | URL
제가 확인해본 건 아니고요, 어디선가 들은 건데, 민음사던가 하여간 조만간 번역 출간 예정이라 하더라고요. 좀 기다려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근데요, 오랜 번역이라서 그렇지 이가형 선생의 문장도 사실 좋습니다. 출판사 편집 팀에서 조금만 더 신경을 썼어도 꽤 좋은 책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monde24 2020-12-2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돈 주고 사기엔 쫌 고가라 ^^; 직장 도서관에 신청해서 들어왔는데 보는 순간 두께에 질려 아직 읽지를 못했습니다. 도전하기 전 서평 읽어보고 심각해지다가 그래도 번역에는 크게 문제가 없는 듯 하여 도전해보렵니다. ^^ 서평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0-12-22 10:53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직장 도서관 신청, 탁월한 선택입니다! ^^

하얀그림자 2022-02-05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약발췌본 읽고 책을 사야겠다 했다가 선생님 서평을 보고 그만두었습니다. 직업 상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이 아니라면 은퇴 후로 미루고 싶군요. 정말 유익한 서평이었습니다. 술술 읽혀도 쉽지 않은데 30년 전 번역에 1400 여 쪽이라니요…

Falstaff 2022-02-06 19:19   좋아요 0 | URL
오, 그래도 이 작품이 잉글랜드에서 쓰여진 역대 최고의 소설이라고들 합니다.
제가 읽은 다음에 느낀 건, 이리저리해서 결혼해 죽을 때까지 잘 먹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가 아닌 결혼 후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이란 거였습니다만.
읽으실 만할 겁니다. 도서관 이용하시면 좋겠습니다.
ㅋㅋㅋ 저한테 ‘선생님‘이라니요. 같은 서재 이용자일 뿐인 걸요. 전 지금 막, 은퇴해서 내일 임플란트 두 개 박으러 가는데 아휴, 신경이 좀 쓰이네요. ^^;;;

cyh7401 2023-10-1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미들마치 읽고 싶은데, 쉽지않을 것 같음을 느끼게 됩니다.

Falstaff 2023-10-16 06:43   좋아요 0 | URL
민음사던가 어느 출판사에서 이 작품을 번역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거 같습니다. 근데 그게 3~5년 전이거든요. 아직도 나오지 않은 걸 보니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도서관 이용하시면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