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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요정 ㅣ 베루프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1월
평점 :

책을 읽다 보면 관심가는 작가님이 생긴다. 그런 작가님의 작품을 출간 순서대로 읽는 건 꽤나 덕후스럽지만, 인상 깊은 경험이 된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책을 쓰고 있는지, 어떻게 가치관이 변해왔는지, 문체와 구성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찾다보면 한 번도 뵙지 못한 작가님과 가까워진 느낌을 받는다.
22년 9월 출간 된 『흑뢰성』을 읽고 오랜만에 그런 덕질이 하고 싶어 졌다. 발행 순서 대로 서평을 쓸까 했지만, 시리즈물과 단편, 장편이 섞여 있어 글이 지저분해 보일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특정 시기별로 묶어 써볼까 한다. 가장 먼저 소개할 작품은 대표작 <고전부 시리즈>(아껴두었다 마지막에 할 생각)가 아닌 <베르푸 시리즈>의 프리퀼 『안녕 요정』이다.
『안녕 요정』은 ‘요네자와 호노부’ 작가님의 초기 장편소설이다. 작품은 고등학생 주인공이 우연히 만난 유고슬라비아(지금은 사라진 나라) 소녀와 있었던 이야기를 담았다. 2개월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주인공은 그녀로 인해 새로운 세계와 꿈에 대해 알게된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뒤 겪게 되는 청춘의 좌절감, 상실감 등을 나타낸 작품이다. <고전부 시리즈>와 비슷한 코지 미스터리(일상 추리 소설)의 형태를 가졌지만, 『흑뢰성』과 같이 실제 있었던 사건을 가져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점도 흥미롭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베르푸 시리즈의 탄생>
베르푸 시리즈의 Beruf 는 독일어로 ‘사명, 소명, 천직’을 뜻하는 단어다. 2편과 3편에 해당하는 『왕과 서커스』(2016)와 『진실의 10미터 앞』(2018)에서 기자로써 사명을 ‘다치아라이 마치’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추측된다. 『안녕 요정』은 그런 ‘다치아라이 마치’의 학창 시절을 엿볼 수 있다.
원래는 작가님의 초기 대표작, 청춘 미스터리 소설 <고전부 시리즈>의 3권으로 출간 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기존 출판사(카도카와 스니커 문고)와의 의견 차이로 출판사(도쿄창원사, 東京創元社)를 옮기며 전면 개정 후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주석, 번역자 말 및 위키피디아) 몰라도 상관 없지만, 이후 소개 할 『왕과 서커스』가 강추하는 작품이라 ‘이 시리즈에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구나’하는 정도의 TMI로 알려드린다.
『안녕 요정』은 베르푸 시리즈이긴 하지만 ‘다치아라이 마치’가 아닌 남자 주인공 ‘모리야 미치유키’의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모리야와 ‘마야(마리야 요바노비치)’의 만남을 그렸다. 코지 미스터리인 만큼 살인사건은 나오지 않고, 외국인의 어눌한 일본어와 문화 차이로 발생하는 소소한 문제를 다룬다.
2, 3장에서는 마야의 송별회를 하며 생긴 일본인 이름에 관한 미스터리와 마야의 고향을 어딘지 찾는 내용이 담겨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일상 미스터리지만, 일본 문화와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해결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해하고 즐기는데는 문제없지만, 추리/미스터리 소설 읽으며 직접 문제에 도전하는 독자라면 조금 속이 조금 쓰릴 수 있다.
<『흑뢰성』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다>
『안녕 요정』이 단편적 학창시절 이야기만 담았다면 잘해봐야 평범한 작품, 까닥하면 1쇄 후 절판되는 소설이었을지 모른다. 소소한 재미는 있지만, 한 방은 부족하고 이후 시리즈를 이어나가기엔 서사가 빈약했을거다.
하지만 역시 요네자와 호노부 작가님은 설정을 허투루 남발하지 않는다. 지금은 사라진 나라 ‘유고슬라비아’의 이야기를 가져와 마야라는 인물에 입체성을 더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통해 청춘의 헛발질, 감정과 연결해 인상적인 소설을 만들어냈다.
작가님의 대표작 『흑뢰성』은 작년 일본 순문학 최고 권위상 ‘나오키 상’과 추리소설 대표상 ‘본격 미스터리 대상’ 외 총 9관왕을 차지했다. 이유에는 여러가지 있겠지만, 이렇게 추리/미스터리 소설을 흥미로만 여기지 않고, 거기에 <작가 의식>을 담아 현실을 표현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데뷔 초 코지 미스터리, 청춘 미스터리 소설을 쓰던 작가님은 『안녕 요정』을 계기로 실제 사건을 자신의 세계관에 가져와 쓰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작가님이 ‘주부 내공 10단의 손맛으로 비벼낸 추리/미스터리 + 현실 문제를 담은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시작점이다.
본격 추리 소설류의 탐정과 깔끔한 해결, 마무리, 반전 혹은 서양 미스터리의 고구마+사이다 전개, 손에 땀을 쥐는 장르 좋아하시는 분에겐 다소 심심한 소설이다. 거기다 책을 읽으며 직접 문제풀이를 즐기는 분에겐 더욱 읽기 힘든 작품이다. 웬만큼 일본 문화에 빠삭하지 않으면 트릭 풀기가 불가능하다.(홍백 뜻을 알고, 일본 이름 한자에 빠삭하다면 풀이에 도전!!!)
하지만 홀로코스트 이후 가장 추악한 인종 대학살(제노사이드)로 평가 받는 ‘보스니아 내전’을 소재를 가져와 자신의 장기인 코지 미스터리와 엮어 냈다.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사건을 대학교에 가서도 연구한 뒤 잊지 않고 소설에 녹여낸 점이 존경스럽다.
추리/미스터리 소설 보다 순문학 소설을 좋아하는 분이 흥미를 가질 만한 작품이지만, 요네자와 호노부 작가님의 팬이라면 빼놓지 않고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 독서를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