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연물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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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독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저자의 도전장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저자의 안내를 받는 사람. 전자는 작품 속 단서를 모아 직접 추리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저자가 제시하는 이야기와 결말을 즐기는 사람이다. 

 


정답은 없다. 장르에 따라 추리가 불가능한 작품도 있다. 하지만 공정한 추리소설을 읽으며 저자와 한 번도 '추리 대결'을 펼치지 않은 사람은 추리소설의 진가를 100% 맛봤다고 할 수 없다. 






『가연물』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이다. 일본의 주요 미스터리 문학상인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 ·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를 차지한 작품이며, 독자와의 추리 대결을 펼치는 본격 미스터리를 표방하고 있다.



<블록버스터 영화와 예술 영화는 감상 포인트가 다르다>

『가연물』은 <올 요미모노>라는 일본 잡지에 2020년 7월부터 비정기적으로 연재된 요네자와 호노부의 단편 다섯 개를 엮은 책이다. 군마 현경 본부 형사부 수사 1과 가쓰라 경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각각의 단편은 <사건 발생 → 조사 → 단서 수집 → 추리 → 결말>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과정이 아주 담백하게 표현된다. 등장인물 또한 이렇다 할 서사가 없다. 그 덕에 오롯이 '추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이 『가연물』의 호불호를 가른다.



연쇄살인과 같은 흉악 범죄가 일어나고 경찰이 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숨겨진 비밀이 하나둘 밝혀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소설은 분명 흥미롭다. 도파민을 자극하며 책을 손에서 뗄 수 없게 만들며 결말부에서는 짜릿함을 선물한다. 비유하자면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와 닮았다. 



하지만 일본 추리소설 『가연물』은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예술 영화와 비슷하다. 본질에 충실하여 작품의 내공을 느낄 수 있으며, 독자의 태도와 역량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SNS 상에서 『가연물』에 대한 평이 갈리는 건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직접 운전대를 잡을 용기가 필요하다.



<단서는 모두 주어졌다>

한 줄 평의 775분(12시간 55분)은 내가 『가연물』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이고 위 표는 상세 내역이다. 330쪽 내외의 책을 읽는 데 13시간 가까이 소모하는 건 분명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선 그에 합당한 수고가 필요하다. 사건 현장을 상상하고 주인공처럼 단서를 모으며, 작가가 심어둔 복선을 찾아 해답에 도달하는 건 '공정한 추리소설'에서만 즐길 수 있는 별미다.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참고로 약간의 힌트를 주자면 첫 번째 단편 <낭떠러지 밑> 어떤 흉기가 사용되었나이고, 두 번째 ~ 네 번째 단편은 범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이고, 다섯 번째 단편은 범인은 누구인가에 대해 추리하는 문제이다. 소설 속에서 굵은 글씨로 쓰인 단어와 주인공 가쓰라 경부가 반응하는 곳에서 잠시 멈춰 추론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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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함'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했지만, 『가연물』은 소설로서도 매력적인 부분이 많다. 작가가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방식,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 플롯을 배치한 방식, 독자의 시선을 돌리는 기교 등 노력하는 천재 요네자와 호노부의 기술을 마음껏 엿볼 수 있다. 



일본 추리소설 시장이 오래도록 인기를 유지하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이유는 중 하나는 '유연함'이다. 본격 미스터리 · 사회파 미스터리 · 신본격 미스터리를 거쳐 최근 몇 년 동안 유행한 도파민이 팡팡 터지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를 지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본격을 이야기하는 게 여러모로 대단하다. 그 증거가 요네자와 호노부의 『가연물』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이다.



킬링타임용 충격의 반전이 기다리는 추리소설을 기대하는 독자에게  『가연물』은 분명 심심할 것이다. 하지만 편식은 좋지 않다. 저자가 보낸 도전장을 열어보길 권한다.




<참고 자료>

1. books.bunshun / 祝 『可燃物』ミステリランキング3冠! 米澤穂信による警察ミステリの新たな傑作。刑事の“名探偵”は菓子パンとカフェオレがお好き?

2. book.asahi / 米澤穂信さん「可燃物」インタビュー 主人公は現役警部、ミステリ小説で描きたい「より大きなもの」

3. sankei / 謎解き小説の核とは 『可燃物』米澤穂信著

4. books.bunshun / ミステリーを書くために“警察”を選んだ――『可燃物』(米澤穂信)

5. 디시 인사이드 추리소설 갤러리 /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2024 요네자와 호노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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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시스템 - 거의 모든 일에 실패하던 자가 결국 큰 성공을 이루어낸 방법, 개정판
스콧 애덤스 지음, 김인수 옮김 / 베리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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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한 줄은 인상 깊지만 그걸 뒷받침하는 근거나 사례가 부실하다. 자기계발서나 동기부여 영상을 자주 접한 독자라면 얻을 게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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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이디어 물량공세 - 스탠퍼드대 디스쿨의 조직 창의성 증폭의 과학
제러미 어틀리.페리 클레이반 지음, 이지연 옮김 / 리더스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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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vs 루틴
‘창의성‘에 대한 인식 전환.
재능의 한계를 느낀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희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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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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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을 고를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믿을 만한 작가의 추천 책을 읽는 것이다.


돈을 받고 쓴 적당한 추천사는 제외하고 진심을 다해 추천하는 책, 팬임을 자처하며 소개하는 책은 대부분 만족도가 높다. 스테디셀러 『자기만의 방』으로 잘 알려진 버지니아 울프가 8개월에 걸쳐 해즐릿의 방대한 전작을 읽고 사후 100주년 기념 에세이를 썼다는 책은 당연히 믿음직하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1800년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에세이스트로 불렸던 윌리엄 해즐릿의 국내 첫 번역본이다. 뛰어난 문학 비평과 에세이를 남긴 그는 철두철미하고 급진적 정견 때문에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공격받았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조금도 굽히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집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제목처럼 우리가 기피하는 감정을 깊숙이 파고든다. 장강명 작가의 추천의 말, 버지니아 울프의 서문을 제외하고 6편의 에세이를 담고 있는데 제목부터 날카롭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질투에 관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 <맨주먹 전부>.

자칫하면 투정을 부리거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소재인데, 해즐릿은 솔직함으로 이를 돌파한다. 포장하지 않고 오롯이 그 감정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 논리적이면서 동시에 위트 있게 설명한다. 책을 읽는 내내 웃다가도 뜨끔한 경험을 한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밑줄. 그리고 또 밑줄>

최근 내가 독서를 하며 가장 많이 신경 쓰는 부분은 막연하게 밑줄을 긋거나 포스트잇 붙이지 않기이다. 그런데 추천 에세이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공감 가는 문장 · 반성하는 문장 · 배우고 싶은 문장이 쉴 틈 없이 등장해서 형광펜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괜히 1800년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에세이스트로 불린 게 아니구나 하고 납득했다. 아마 많은 독자가 나처럼 밑줄을 그으리라 짐작한다. 도대체 이 책을 읽고 와닿는 문장이 없다면 어떤 책에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한 명의 작가 지망생으로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처럼 뛰어난 책을 만나면 질투심이 생긴다. 그런데 이마저도 이 책에 실린 에세이 <질투에 관하여>를 읽으며 부질없음을 느꼈다. 모두가 행복과 쾌락을 찾는 시대다. 반대로 어둡고 불편한 감정은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인간이 가진 감정이다.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외면하는 감정도 제대로 알고 다스리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발판이 된다. 윌리엄 해즐릿이란 200년 전의 시니컬한 에세이스트에게 마음껏 조언을 구하자.


(아티초크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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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뇌의 역사 - 파블로프에서 한국전쟁 그리고 소셜 미디어까지
조엘 딤스데일 지음, 임종기 옮김 / 에이도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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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종교인 등은 대중을 현혹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한다. 그중 하나가 날조 · 선동과 같은 '가짜 뉴스'다. 그래도 이전에는 많은 인적 자본이 필요해서 한계가 뚜렷했는데, 최근에는 AI 기술의 발전으로 사진과 영상 제작이 더 쉬워져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이런 행위는 '세뇌'로 볼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 하지만 좁게 볼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반의 문제로 접근해야 사건 · 사고를 막을 수 있다.  

『세뇌의 역사』는 1976년부터 1985년까지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미국 대통령 정신건강위원회 자문 위원을 역임한 저명한 정신의학자 조엘 딤스데일의 저서다. 현재 그는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캠퍼스 정신의학과 석좌교수 재직하며, 스트레스, 잠, 삶의 질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악의 해부』 『생존자들, 희생자들 그리고 가해자들: 나치 홀로코스트에 관한 에세이』 등이 있으며, 이번 책은 나치 전범들의 심리를 분석한 『악의 해부』에 이은 두 번째 번역서다.



<세뇌는 정말 가능할까?>

작년 읽은 일본 추리소설 『명탐정의 제물』의 소재는 미국의 사이비 교주 짐 존스에 의해 일어난 집단 자살 사건이었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정말 이 정도로 쉽게 사람들이 세뇌를 당한다고?'라는 의문을 가졌다. 평범한 사람이 봤을 때 세뇌 당한 사람들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비상식적인 언행에서 불쾌감마저 느낀다. 그런데 조엘 딤스데일 저자의 『세뇌의 역사』를 읽고 나면 나 또한 언제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심이 든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전쟁과 관련해 벌여졌던 참혹한 세뇌의 역사를 다루고, 2부에서 범죄자와 종교집단이 어떻게 세뇌를 다뤘는지 상세하게 설명한다. 3부에서는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세뇌를 언급하는데 1~3부 모두 유익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인문학 책임에도 높은 몰임감을 느낄 수 있다.



<한국전쟁, 스톡홀름 증후군, 사이비 종교의 집단 자살, 쇼셜미디어와 가짜 뉴스>

『세뇌의 역사』를 읽으며 가장 놀랐던 부분은 '세뇌(brainwashing)'라는 용어가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졌다는 부분이다. 책에서 한 챕터를 차지할 만큼 상세히 다루는데, 우리 역사에 있어 너무나 아픈 기억이 세계 심리학 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페이지였다는 게 씁쓸하다. 

이외에도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을 뜻하는 '스톡홀름 증후군'과 세뇌의 대표적 사례 각종 사이비 종교 단체의 집단 자살 사건. 그리고 현대의 가장 큰 화두 쇼셜미디어와 가짜 뉴스에 대해서 저자만의 분석을 엿볼 수 있다. '본인의 자유와 의지에 무관한 다른 생각을 갖게 하는 게 가능할까?'라는 의문에서 펼친 책은 궁금증 해소를 넘어 생각의 확장을 불러온 수준 높은 인문학 책이다.



책을 꾸준히 읽다 보면 1년에 몇 권씩 지식과 지혜가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 이 느낌을 잊을 수 없어서 포기하지 않고 책을 읽는데, 『세뇌의 역사』는 2024년 하반기 인문학 서적  베스트 목록에 당당히 올릴 수 있는 책이다. 자칫 편향된 주장을 펼칠 수 있음에도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며 균형 있게 '세뇌'의 역사를 되짚는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류의 잔혹한 역사와 전쟁 · 종교의 양면성을 깨닫는다.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가짜 뉴스'에 대한 저자의 걱정이었다. '취약한 인간의 정신을 조작하기 위해 현대의 인지과학, 신경과학, 행동과학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라는 문장이 무겁게 다가온 이유다.



(에이도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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