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책이야! - 2024 개정 초등 1-2 국어 국정교과서 수록 도서
레인 스미스 글.그림, 김경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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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재밌다.
나는 재미있었다.
7살 먹은 세연이도 재밌다고 봤다.
시계를 곧잘 보게 된 세연이는 동키가 4시간 반 동안 책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는 동키가 게으르다며 큭큭 웃어댔다. (우리 세연이는 책이 재미없다 보다. 4시간 반 동안 자신을 사로잡을 책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메일도 트위터도 와이파이도 모르는 세연이도 이 책이 재밌다고 했다. 나는 더 재미있었다. 메일도 트위터도 와이파이도 줄 수 없는 책의 즐거움이,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동키와 몽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책은 ‘보물섬’이다.
아.. 보물섬.
아직 우리 세연이는 보지 못한 책, 그렇지만 아득히 먼 옛날 내가 봤던 책 보물섬.
짐과 실버의 우정.
정의로운 짐과 욕심 많은 실버의 운명의 엇갈림.
보물을 두고 벌어지는 해적과 신사들의 전쟁.

아득히 먼 옛날, 이 책을 보기 전에 잊혀졌던 그 옛날,
우리 엄마는 나에게 내일도 학교 가야 한다고 자라고 자라고 잔소리를 하셨고..
난 동키처럼 이 책에 빠져버렸다.
실버는 보물 지도를 뺏기 위해 짐의 우물에 독을 풀었고, 생존을 위해서 보물지도를 포기하려던짐의 일행은 때 마침 내리는 단비에 실버의 덫에서 빠져 나오는 그 순간, 그 순간을 읽기 위해서 스탠드 불빛을 이불로 가리며 늦은 밤 숨죽여 짐의 모험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던 그 순간으로 나를 데리고 가버렸다.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그 옛날의 그 순간으로 말이다.

8090 유행가를 들으면, 처음 그 노래를 듣던 순간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간다고 한다. 유행가는 기억 속의 타임머신이 된다고 하는데 책은 유행가보다 더 생생한 타임캡슐과 같다.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책은 고스란히 기억해주기 때문이다.  

아마존 서평에 보면 전자책을 즐겨보는 친구들과 21세기에도 종이 책이 지속될지 의심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고 써 있는데 나도 그렇다. 종이 책이 주는 즐거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이다. . 10.1인치 LED화면이 절대로 기억할 수 없는 내 어린 시절까지 말이다.
와이파이도 트위터도 페이스 북도 모르지만 동키와 몽키, 마우스의 재치 넘치는 대회에 7살 어린 세연이도 즐거워하면 본 책, 그리고 유년기의 내 모습과 조우하게 만들어 준 책..
100점 만점에 1000점을 준다고 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아름다운 책이다. 
 

그래, 바로 이 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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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을 발로 찬 소녀 1 밀레니엄 (뿔) 3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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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지.
밀레니엄의 마지막 소설, 리스베트의 끝, '벌집을 발로 찬 소녀'다. 밀레니엄의 첫 번째 시리즈 '여자를 증오한 남자'에서는 1,2권이 전부인데 반해서 두 번째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와 세 번째 '벌집을 발로 찬 소녀'는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다.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에서 궁금했던 점은 이 책에서 거의 대부분 모두 해결된다. 리스베트도 용맹한 자신의 캐릭터를 찾아가고, 슈퍼 블롬크비스트도 기자로서의 위엄과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준다. (그래도 무능하긴 무능해. 모든 문제를 우리의 리스베트가 다 풀어내지) 모든 캐릭터들의 생사가 결정되고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에서 벌려 놓기만 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마무리 하고 있다.

모든 문제의 중심인 ‘살라’ 그리고 그를 이용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권력을 가지고 싶어했던 사람들의 심판대에 오른다. 냉전시대도 끝났고 살라와 관련된 정보는 더 이상 일급 정보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로 인해서 행해진 공권력 남용을 숨기려는 옛 정보국 ‘섹션’의 사람들과 이를 밝히려는 리스베트와 밀레니엄 연합군(?)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된다.

과연 치열했을까?
치열할래야, 치열한 수 없는 싸움이다. 연합군(?)에겐 리스베트가 있다. 아날로그 세상에서는 ‘섹션’의 첩보 활동이 우세했을 지도 모르지만 냉전시대가 끝난 지금은 ‘디지털’시대다.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휴대폰으로 컴퓨터로 공유되고 있다. 스파이들도 어쩔 수 없이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고 그들이 컴퓨터에 로그인 하는 순간 승패는 결정된다. 리스베트는 3중, 4중의 방화벽을 뚫고 당신이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을 쉽게 침투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해커에게 컴퓨터만 쥐어진다면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을 보면서 통쾌했나? 아니
이 책을 보면서 재미있었나? 아니

이 책을 보면서 또 다시 답답했다.
두 가지 가정을 해 볼까?
아무리 억울했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1990년대와 같은 냉전시대였다면 리스베트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 때와 같이 정신병원에 갇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진실이 그녀의 편이었지만 권력을 ‘살라’의 편이었으니까. 21세기 권력의 모습을 변했고 리스베트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진실을, 권리를, 자유를 쟁취한다.

또 하나의 가정. 리스베트는 약자였을까?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을 때려잡는 이야기에 열광한다. 다윗은 우리와 다름없이 작고 연약했으며 그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꾀와 조약돌뿐이었다. 그런 다윗이 골리앗처럼 크고 강하고 권력 있는 자를 무너뜨리는 이야기가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는 ‘희망’ 때문이다. 작고 연약해도 영리한 머리와 진실한 용기만 있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교훈 때문이다.

그러나 리스베트와 블롬크비스트는 다윗이었을까?

리스베트는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법이란 모든 법에서 사람들에게 허용한 자유, 아무에게도 침해 받지 않고 적법한 절차를 취하지 않고는 엿볼 수도 없는 디지털 속 사생활 곳곳에 침투해서 사람들이 절대 들어내고 싶지 않은 비밀을 파고 든다. 물론 리스베트는 엄격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고, 힘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약하고 힘없는 피해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긴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사용하건 하지 않건 간에 나는 리스베트라는 영웅이 내 컴퓨터를 유영하며 무언가를 찾고 있을 생각을 하면 끔직하다. 이 사건도 애초에 리스베트가 블롬크비스트이 컴퓨터를 해킹해서 헤집고 다니지 않았다면, 동유럽 소녀들의 성매매를 다룬 다그 스베손의 리포트에서 ‘살라’라는 이름을 찾지 않았다면 어쩌면 발생하지도 않았을 사건인지도 모른다.

블롬크비스트는 그의 별명에서 알 수 있든지 언론계의 슈퍼맨이다. 무엇이든 사회의 취약한 점을 발견하면 맹견보다 더 강하게 물고 뜯어 진실을 파헤치고 만다. 생명의 위협과 맞서 싸워 얻은 자산, ‘신뢰’를 가지고 있다. 신뢰감 높은 언론인이 밝히는 ‘진실’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에서 용의자였을 뿐인 ‘리스베트’가 받아야 할 언론재판을 보며 언론이 한 인간을 얼마나 깊은 수렁을 몰아 넣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진실이었던, 아니었던 간에 말이다) 비밀을 파헤친 신뢰감 높은 기자의 힘이란 것은 대법원의 판결만큼 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냉전시대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섹션’의 사람들을 보며 그들은 힘없이 늙고 추레해진 골리앗이고 언론과 디지털이라는 신세대의 무기를 장착한 리스베트와 블롬크비스트는 자동화기로 무장한 다윗으로 보였다. 왜냐면 나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것을 해결한 언론의 힘도 디지털의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평범한 자에게 있지 않다. 모드 슈퍼맨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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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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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내가 바보가 된 줄 알았다.
스스로 독해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책을 읽고 작가의 이야기하고자 했던 주제를 집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의 끝에서 나에게 주어진 질문은 ‘대체 뭐냐, 이거? 대체 뭔 이야기야?’ 라는 어리둥절함 뿐이었다.

‘곤’은 아주 어렸을 때 죽을 고비를 넘긴다. 생활고를 못이긴 아버지가 곤과 함께 ‘이래호’에 뛰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고비를 상처로 이겨낸다. 귀 뒤, 목덜미에 깊게 패인 것과 같은 상처, 그러나 물이 닿으면 분홍색 속살을 들어내고 물 속에 녹아 있는 얼마 되지 않은 산소를 빨아드리며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얻는 ‘아가미’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아가미를 준 물은 ‘곤’에게 무시무시한 공간이다. 태초의 가족을 잃게 한 공간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가족인 ‘노인’과 ‘강하’의 목숨을 앗아간 공간이다. 그렇지만 그 무섭고 끔직한 공간에 ‘곤’은 뛰어든다. 상처에 굴하지 않고 상처 준 훈장과 같은 아가미를 통해서, 거친 물살을 힘차게 가르며 삶을 계속해 나간다.

자 이건 어젯밤에 이 책을 다 읽고 정말 모르겠는 소설을 밤새 부여잡고 스스로 생각해 낸 짜 맞추기에 불과하다. ‘상처’가 ‘아가미’가 되는 소설은 많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람’의 상처는 1억루피라는 ‘아가미’가 됐다. ‘바람을 만드는 소년’의 ‘브랜트’의 상처는 다른 이에게 힘과 용기라는 아가미를 선물한다. 그럼 ‘곤’의 아가미는??

곤의 아가미는 물론 휴대폰을 잡기 위해서 한강에 빠진 ‘해류’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한다. 그렇지만 그의 아가미는 그를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칭해준 ‘이녕’의 목숨을 빼앗고 노인과 강하의 삶 속에서 쫓겨난다. 또 우연의 중첩이긴 하지만, 결국 곤이 새로운 삶을 선물한 ‘해류’의 방문으로 인해 강화와 노인은 목숨을 잃는다. 결군 곤의 아가미는 스스로 인식하는지 모르지만, 다른 이에겐 불행이자 저주다.

세상의 물은 ‘이래호’ 뿐이었던 곤은 ‘강하(江河)’ 때문에 강으로 나서고, 또 해류(海流)와의 만남을 통해서 바다로 나선다. 곤이 자신의 아가미를 어떻게 받아드리는 지 잘 모르겠다. 그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는지 저주로 생각하는지... 이런 생각도 독자의 사치인가? 이런 생각도 없이 주어진 아가미를 그대로 받아드리며 만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바다를 힘차게 유영하고 있을 뿐인가?

이 책을 읽은(사실은 작가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상상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독해력이 부족해서인지 이 질문을 하고 나면 머릿속이 멍해지고 하얗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곤이라면.. 당신에게도 아가미가 생긴다면... 당신은 어떤 바다를 유영하고 싶은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읽는 2시간 동안 책에 매여서 쉽게 읽을수 있지만, 읽고 나면 대체 이 책이 뭐야,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뭐야 ?라는 내가 모자라서 못찾는 거야, 작가가 모자라서 못찾는 거야 라는 비아냥 거리는 질문이 하루 종일 떠나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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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5-05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미...가 퇴화된 건지, 그런 흔적 기관으로서의 아가미에게 다리는 무엇인지..
동화적인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좀 도식적인 소설이었죠.
글을 아주 잘 짚어낸 리뷰같네요. ^^

KNOCKOUT 2011-05-06 10:08   좋아요 0 | URL
저는 전작 '위저드 베이커리'가 너무 좋아서 한달음에 읽었는데 전작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샘님도 그렇죠?? ㅋㅋ

글샘 2011-05-08 12:44   좋아요 0 | URL
네, 딱 그거죠. ^^
 
트리갭의 샘물 눈높이 어린이 문고 5
나탈리 배비트 지음, 최순희 옮김 / 대교출판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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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듣는 수업 교재로 사용된 책이다.
읽기 전부터 싫었다. ‘트리갭의 샘물’이지만 원제는 ‘TucK EverLasting’이다.
영원한 삶을 사는 터크가의 이야기.
난 영원한 삶을 살래 말래 하는 질문 따위 싫어한다. 한마디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거다. 우리 수업의 선생님은 노골적으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영원한 삶을 살래 말래?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잃으면서 영원한 삶을 살래, 말래 라는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대신 어떤 삶을 살래 라고 묻는다. 여기에 영원한 삶을 살게 된 터크 가족을 통해서 말이다.

가장인 터크는 50대다. 우연히 트리갭의 샘물을 먹고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지만 그것이 영못마땅한다. 터크이 인생관은 이렇다.
죽는 것도 수레바퀴의 한 부분인 거야. 태어나는 것과 함께 말이야.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만 골라 가지고 나머지만 버릴 수는 없는 거야. 수레바퀴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 그것은 축복이야.
이 사람은 삶에 주어진 것을 묵묵히 수긍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부분만 차지 할 수 는 없다고. 좋은 것이 있다면 나쁜 것도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그의 아내 매 터크는 어떨까?
닥치는 대로 받아들여야지. 다른 사람처럼 우리 가족도 하루 하루 살아갈 뿐이야. 아무튼 왜 그렇게 되었는가 따져 보았자 다 소용없는 노릇이지, 뭐.
이 50대의 아줌마는 하루를 살든, 영원을 살든,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갠적으로 나는 이 매 터크 아줌마가 제일 마음에 든다)

22세의 마일즈는 젊은이답게 생각이 조금 다르다. 패기 넘치며 좀더 건설적이다.
내 생각으로는 아버지처럼 숨어 지내는 것은 옳지 않아. 그렇다고 자신의 쾌락만 생각하는 것도 옳지 못해. 이 세상에서 자리를 차지할 바에야 무언가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언젠가는 무언가 중요한 일을 찾아야지.

그렇지마 17살의 제시는 영원히 놀고 싶다.
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온갖 것을 구경하고 즐기는 거야. 이것 봐, 우리 인생이란 즐기기 위한 거잖아. 안 그래?

자신의 나이보다도 80년을 더 살았는데 어떻게 세계관이 보통의 평범한 나이또래의 사람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50대의 터크 가장 아저씨는 이미 아버지가 됐고 손자를 봤기 때문에 자연의 수레바퀴가 더 중요하고, 매 터크 아줌마는 나이든 여성답게 영원보다 더 중요한 하루의 가치를 알고 있다. 22세의 패기 넘치는 젊은이의 생각은 입신양면에 힘쓰고 싶고.. 17살의 어린 제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노는 것’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영원한 삶을 부러워하지 말아요. 그것은 축복이기도 하고, 저주이기도 하니까요는 아닌 것 같다. 영원한 삶을 살든, 말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과 같은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떤 사람이 될래?

영원한 삶을 살게 된 터크 가족을 통해서 우리는 네가지의 유익한 보기를 얻었다.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은 어떤 삶인지.. 이제 찍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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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와 버질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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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7-8년전 가장 많이 산 소설 중의 하나가 '파이이야기’이다.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좋았고, 또 내 조카들이나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들에게도 무난히 한번 읽어보세요 라고 권할 수 있는 책이었다. 세대와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읽고 느끼고 그리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책,그런 책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그리고 이제 고작 30대의 젊은 작가가 그런 글을 써내다니! 그것도 백인남성 작가가! 그가 근 10년 만에 내놓은 책이기에 그것도 '파이 이야기'처럼 우화집이라니! 정말 궁금한 마음에 한달음에 읽어갔다.

얀 마텔의 소설은 1인칭 시점을 사용해서 자기 고백적인 성격을 띤다. 그의 모든 소설이 그렇다. 이 소설도 어느 순간까지 헨리가 겪은 이야기를 우리는 얀 마텔이 정말로 겪은 일이겠구나, 젊은 작가의 빠른 성공 이후 얀 마텔이 겪어야 했을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찬찬히 서술하고(정말 잘난 척이 많긴 하다) 독자는 조금 더 헨리를 혹은 얀 마텔을 이해하여, 독자와 작가의 사이는 급속히 아주 쉽고 빠르게 좁혀진다.

헨리가 혹은 얀 마텔이 쓰고 싶은 다음 책은 홀로코스트다.
수만가지로 생산된 홀로코스트에 대한 문화적 양식은 '다큐멘터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헨리 혹은 얀 마텔이 쓰고 싶은 것은 예술로 승화된 홀로코스트다. 그래서 희곡과 평론이 조화된 플립북을 만들고 싶어하던 헨리가 나온다. 그러나 편집자들한테 호되게 비판을 받은 헨리는 미국으로 건너와 작가의 삶에서 떨어져 일상을 즐긴다. 그러다 자신의 손에 떨어진 희곡 하나를 만나고 그 때문에 인생이 조금 꼬이게 된다.

자... 우리는 우연히 작가의 손에 떨어진 그 희곡이 애초에 작가가 쓰고 싶어하던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희곡임을 알고 있지만, 대체 이 희곡과 홀로코스트와의 연관을 잘 모르겠다. 마지막 페이지를 몇 장 남겨두고 알게 되지만, 그 이전까지 우리는 조금 지루하고 심심한 헨리의 일상에 동참해야 한다. 그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금관 악기를 배우고 개와 고양이를 잃고 아버지가 되는 순간까지 말이다. 그 반전이 소름 끼치고 얼굴이 화끈거리게 만들긴 하지만, 이 지루한 소설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읽게 된 ‘베아트리스와 버질’이라는 희곡을 통해서 자신이 시도한, 예술성이 가미된 홀로코스트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깨닫는다.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범죄 혹은 비극을 어떤 예술로도 승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 이 소설 자체가 기만이다.
한편의 희곡과 그것을 일게 된 작가의 평론을 통해서 얻어낼 결론은 자신의 일기장에나 기록될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재기 넘치는 시도를 통해서 재 해설될 수 없을 만큼 (작가가 고백했듯이 말이다) 홀로코스트는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끔직한 범죄였고, 역사에 기록돼 다시는 행해져서는 안될 惡 그 자체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소설이 아니라도 해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작가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전쟁에 대해서 냉소적이다. 특히나 전쟁이라는 것을 평생 아니 자신의 모국 역사상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2차대전마저도 가뿐히(?) 피해간 캐나다 인이 쓰는 홀로코스트는 위에서 말한 식으로 기만 이상이 될 수 없다. 만약 홀로코스트의 참상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안네프랑크의 일기를 다시 읽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 소설에서 나온 ‘쥐’를 읽는 것도 괜찮겠다. 젊은 작가의 기만적 재기 이상을 보고 싶은 독자라면 절대 잃지 말아야 할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 ‘베아트리스와 버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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