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와 비밀의 부채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자마자 나는 컴퓨터를 부팅해 누슈를 검색했다. 누슈가 어떤 모습의 글자인지, 책 읽는 내내 궁금했다.



왼쪽이 내가 구글에서 찾은 누슈 문자다. 이 책만큼 아름답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자 한자대신에 한자의 모양을 빌어 만들어낸 표음문자라고 한다. 남성의 한자보다 간결하고 부드럽다.. 1950년대 이 문자가 발견되고 냉전이 치열했던 시대였던 만큼 첩보전의 암호로 오인 받고, 나리의 부족인 야오족의 방언임을 알게 된다. 1984년에 이르러서야 여성들의 글자라는 누슈라는 이름을 얻게 되지만 2004년 마지막 누슈 능통자가 사망하고 나서, 그 해석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설화’의 삶처럼 굴곡이 깊은 문자인 듯 싶다. 그러나 이런 배경 지식이 있건 말건, 이 책을 읽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나리와 설화의 아름답고 서글픈 우정이야기를 담아낸 ‘문자’라 관심을 갖게 된 것뿐이다. 이 책을 다 읽은 후의 느낌은 ‘즐겁다’ 다. 아주 즐거운 독서 여행이었다. 4시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즐거운, 그런 독서여행을 주었다.

난 ‘대지’의 작가 펄 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대륙을 파는 장사꾼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펄 벅이 중국에서 오래 살았고 또 중국을 사랑한다 손 치더라도, 그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 다만 펄 벅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미지의 땅을 서양인들이 보기 편하게 만들어 놓은 상품을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중국작가도 중국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살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떻게 결혼을 하며 어떤 삶을 사는 지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중국 작가들은 그런 의례가 아닌 중국인의 삶에 매달리는데 반해서 오로지 서양작가들만이 중국의 의례에 매달린다. 나는 그게 거슬린다. 중국인들의 삶이 왠지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눈요기 거리가 되는 느낌이다. 내가 중국인이었다면, 그래서 ‘대지’를 읽었다면 펄벅의 중국에 대한 이해를 감사하기보다 왠지 모욕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어떤 부분은 중국에 대한 몰이해로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 작가가 노벨상 수상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타민족, 타 국가의 이야기를 쓰는데 작가는 그리 용감할 필요가 없으며 쓴다면 그 민족과 국가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고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작가는 미국인(중국계라고 하지만)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아주 재밌다. 이 책은 다만 중국이 배경이었을 뿐, 우리네 할머니가 살았을 삶을, 혹은 우리 ‘여성’들의 삶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리’와 ‘설화’의 서글픈 인생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 이야기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P. 52
당시에는 알지 못했었다. 내 작은 발은 미래의 시댁 사람들에게 출산의 고통뿐만 아니라 어떤 불행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나의 자제심과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터였다. 또 내가 친정 식구들, 특히 친정어머니에게 순종했음을 보여줌으로써 장래 시어머니가 될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게 될 터였다. 또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내가 수를 놓은 신발은 장래 시댁 사람들에게 자수 솜씨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 일에 대한 내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이 될 터였다
.

나리가 전족을 하면서 알게 된 여성 삶의 현실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자신이 처하게 될 처지. 7살 어린 나이에 발가락 뼈를 부셔 7cm의 작은 발을 갖게 되면서 얻어야 할 가치. 자유를 포기하면서 순종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어린 소녀. 그렇지만 그 소녀는 순종에 머리를 조아리는 대가로 영혼의 친구를 얻는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 부모나 남편도 줄 수 없는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염려하며 마음을 나누고 위로를 얻는 관계, 바로 라오퉁이다.

P65
“착한 섬풍과 여자의 도리를 배우는 소녀가 있다고 들었어. 너와 나는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다지. 우리가 서로 단짝이 될 수 있을까?”

P69
우리 만남이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어. 네가 쓴 말들은 내마음을 채우고, 우리는 한 쌍의 웡앙새가 되겠지. 우리는 강 위에 걸린 다리와 같아.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 둘 사이를 부러워할 거야. 그래, 내 마음은 진실로 너와 함께 하겠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리’지만, 나리를 통해서 영혼의 단짝(라오퉁)인 설화의 인생이야기를 담고 있다. 설화는 아주 부잣집 아가씨로 태어난다. 부자 3대 간다는 말이 없듯 그 아버지는 무능력했고 마침내 아편에 빠져들었다. 그런 설화의 삶을 붙들어 맨 건 ‘나리’와의 우정을 통해서다. 우리로 말하면 몰락한 양반집 자손 나리는 천한 농부의 딸 ‘나리’와 라오퉁을 맺게 되고 그녀에게 여자들의 글자인 누슈를 가르쳐 주고 나리에게서 살아 남는 법을 배우게 된다.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 베를 짜고 수를 놓고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는, 너무나 사소하고 현실적인 어떤 것을 배운다. 자신보다 더 부자고 나은 집에서 자라 세련된 취향과 지식을 가지고 있던 설화는 나리에게 보물 그 자체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집에 오는 날만을 기다린다. 지루한 일상이 계속되는 어린 시절, 나리는 기다림의 설렘을 배우고 누슈 문자를 통해서 친구와 소통하는 법을 알게 된다.

P104
우리가 우슈의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녀가 남들 보기에 행복하고 화려한 생활 뒤에 숨겨진 아픔을 누군가와 공유할 방법을 찾았다는 거야.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선물이 수많은 세대를 거쳐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란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리는 다른 여자와 다르고 또 다른 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빛나던 유년시절은 쉽게 끝나버리고 설화와 나리의 운명은 달라진다. 아름다운 발을 가진 나리는 부유한 루집안으로 시집을 가 그녀의 운명을 예언한 점쟁이의 말처럼 축복된 삶을 살게 되고 설화는 백정의 아내가 되어 구박과 핍박 그리고 학대를 받게 된다.

P343
나는 그들과 함께 수를 놓고, 힘들 때는 서로 위로해주지. 그들은 나를 동정하지 않다. 내가 잘 지내지 못할 때는 나를 찾아오기도 해… 나는 외롭고 혼자니까. 나는 너처럼 정해진 시간에만 와서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일 위로해줄 여자들이 필요해. 내가 옛날에 어땠으며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나를 봐주고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 나는 홀로 날고 있는 새가 된 기분이야. 난 짝을 찾을 수가 없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고 그 노력을 보상받은 나리는 설화에게도 사랑 받기 위해, 더 노력하라며 설화를 벼랑 끝으로 몬다. 그러나 설화는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나리의 충고를 묵묵히 따르며 헌신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P361
설화는 라오통으로 마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어요. 하지만 마님은 너무 남자처럼 생각했죠. 오직 남자의 규칙에 서서 설화의 가치를 평가하고, 남자가 사랑하듯 설화를 사랑했어요”


뒤뚱거리는 몸짓이 남성을 자극한다고 해서, 혹은 멀리 걷지 못해 비참한 현실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중국인들은 ‘전족’을 한다고 한다. 어린아이의 발을 붕대로 칭칭 동여매 발가락 뼈를 부러 뜨려 남자의 한 손에 쏙 들어가게 끔 작은 발을 만들어내는 야만적인 풍습. 이 책을 주인공은 형벌처럼 내려진 삶에 머리를 조아리며 순응한다. 그렇지만 참는 것이 넘쳐 흐를 때 여성들만의 문자인 ‘누슈’를 빌어 남자들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삶의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을 적어 라오퉁에게 보내 감정을 나눈다. 그것만이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다.

진실한 친구 세명을 가졌다면 성공한 인생을 산다고 했는데, 설화가 나리에게 베푼 굳세고 질긴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세 명은 너무 많다고 할 지 모른다. 단 한 사람이 끝없고 흔들림 없는 우정만으로도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그리고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은 나리가 얼마나 서글퍼했는지.. 이 책을 통해서 느껴봤으면 좋겠다.

역시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남자들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아서도 안 되는 누슈 문자처럼 남자들은 별로 감동적이지 않을 책. 그러나 여자라면 그것이 열 일곱 소녀부터 여든 살의 노인까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모진 세월을 견뎌내고 있는 모든 여자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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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죽음
C. J. 샌섬 지음, 나중길 옮김 / 영림카디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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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도원의 죽음은 ‘어둠의 불’의 전작인데, 나는 후작을 먼저 읽었다. .T.T
이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어둠의 불을 좀 다르게 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들지만, 이미 지나버린 것 어쩔 수는 없지 뭐..
크롬웰이 제인 시모어와 헨리 8세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제인 시모어에게서 에드워드 왕자를 얻었으니 크롬웰의 기세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기세 등등 했을 터이고, 뼈 속까지 신교도였던 크롬웰은 이 기세를 몰아 종교개혁에 나선다. 수도원을 해체시키고 수도원에 부속된 땅과 토지를 국가로 귀속시키는 작업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흥선 대원군이 실행한 서원 철폐와 비슷한 모양이다) 귀족과 성직자라는 구세력과 상인, 변호사들로 이뤄진 젠틀리라는 신진세력이 세력다툼을 하며 구세력의 힘의 원천인 토지를 국가로 귀속시키는 작업을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을 실시하지 않았나 싶다. 수도원에서 빼앗은 토지와 건물들은 대부분 토마스 크롬웰 세력에게 넘어갔고, 헨리 8세는 든든한 세수원이 생겼으니 말이다.  

크롬웰은 스칸시 수도원을 해체시키고 싶어한다. 베네틱트 수도원 소속인 스칸시 수도원은 100명의 수도사들이 수도할 수 있는 꽤 큰 수도원이다. 그런데 크롬웰이 보낸 싱글턴 특사가 목이 잘려 죽은 채 발견된다. 크롬웰의 입장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기세 등등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누가 감히, 크롬웰이 심혈을 기울이는 종교개혁에 딴지를 건다 말인가!’ 수도원 해체를 반대하며 일어나는 시위, 폭동, 반역까지 일어나고 있던 때에 크롬웰은 자신의 심복인 변호사 샤틀레이크를 스칸시 수도원으로 보낸다. 싱클턴 특사 살인사건 수사를 맡긴 것이지만……
글쎄… 내 눈엔 싱글턴 특사의 살해사건은 시위와 폭동, 반역까지 벌어지며 여론 전에서 열세였던 크롬웰에게 명분을 세워 줄 수 있었던 살인사건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왕의 종교개혁 명령에 불복하고 특사를 살해한 반역 죄를 씌워 스칸시 수도원을 해체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우리의 꼽추 변호사 샤들레이크는 서둘러 스칸시 수도원에 향한다. 그곳에서 만나는 수도사들은 기득권만을 내세우며 위법하지 않은 선에서 수도원을 지키는데 필사적인 권위적인 수도사들을 만난다. 교구민들의 어려운 삶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웬만한 귀족들보다 사치스럽고 호화롭게 사는 부패한 수도사들을 말이다. 이런 수도사들을 보면 한 순간 개혁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주고도 싶지만, 개혁주의자들도 수도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진세력인 코핀저 치안판사도 지역민들의 삶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크롬웰이 신뢰하는 샤들레이크에게 밉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누가 싱클턴 특사를 살해했는지도 크게 관심 없다. 다만 수도원이 해체되면 주인 없는 땅이 될 수도원 부속 토지에만 관심을 보인다. (오늘날의 정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인이라는 것은 단지 직업일 뿐, 그 직업을 통해서 얻는 부와 명예만 중요할 뿐이다. 국민들의 삶과는 전혀 동떨어져 자신들만의 리그를 치고 사는 것 말이다. -0- 정치인들은 종교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자자.. 이런 와중에 진실을 알고 싶은, 자신의 임무를 끝마치고 싶은 샤들레이크. 그러나 양파껍질처럼 까도 까도 온통 비밀뿐이다. 거기다 샤들레이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싶어했던 사이먼 수련 수사도 살해당하고, 수도원 안 연못에서는 오펀 스톤가드의 시체마저 발견된다. 대체 이 수도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을까요? 제가 바라던 것이라곤 교회를 개혁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세상이 되었을까요? 폭동에 반역, 거기다 이제는 살인까지. 어떤 때는 이 모든 시련에도 어떤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
“인간이 만들어내는 수수께끼 같은 일에는 적어도 하나의 돌파구가 있기 마련입니다”

싱글턴 특사를 따라온 굿햅스 변호사와 샤들레이크와의 대화 내용이다. (P92) 샤들레이크는 인간이 만들어낸 이 모든 시련의 돌파구를 진지하게 쫓아간다. 그러나 진실에 다가갈수록 자신이 품고 있던 신념에 의문을 품게 된다. 교황에게서 독립한 영국 국교회가 이전의 교회보다 더 나은 종교인가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이라는 혼란 속에서 모든 것을 잃게 된 사람도 있고, 목숨까지 빼앗긴 소녀도 있다. 그렇지만 이 혼란이 누군가에게 제 잇속을 차릴 기회가 되기도 한다. 종교개혁은 신념만 있을 뿐, 신념을 통해 구해내려는 현실을 존재하지 않는다는 씁쓸한 결론. 자신들의 젊음을 희생해, 목숨을 바쳐 이루려고 하는 새로운 세상은 없다는 서글픈 현실

이 책을 읽고 며칠 동안 개혁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자 누구를 위한 개혁이었지?
헨리 8세는 자신의 국교회의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선포하고 수도원을 해체시키고 그 자산을 국가에 귀속한다. (그런 주제에 그 돈으로 주구장창 전쟁만 해댔다. T.T) 샤들레이크가 겪는 위험처럼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만 바꿨을 뿐 서민들을 구속하고 착취하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또 끊임없는 전쟁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시기임으로 개혁이 지긋지긋 했을지도 모른다. 샤들레이크의 신념이 흔들리고 이런 종교개혁을 까칠한 시선으로 바라고 있는 서민들을 보면 이 책의 저자 샌섬도 개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 같다.
개혁이 나쁜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나는 개혁을 겪어내는 샤들레이크에서 그 희망을 찾고 싶다. 구세력과는 다른 진실, 다른 논리로 무장한 샤들레이크의 힘 말이다. 예전에 통용되던 지식을 반문하고 새롭게 찾아가는 지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며 겸손한 아주 합리적인 인간형 말이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무자비한 권력을 지닌 정점의 한 인간(크롬웰처럼)이 아니라, 샤들레이크나 마크, 앨리스와 같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며 다른 사람들을 믿어내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주는 책, 16세기 영국의 풍속화 같은 일상이 궁금한 사람들을 위한 책, 무엇보다도 그 일상속에서 개혁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미스터리의 껍질을 뒤집어 썼지만, 미스터리보다는 16세기 영국 종교개혁의 다큐멘터리와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다. (샌섬의 후작, ‘어둠이 불’도 이런 느낌이다) 두껍고 무겁고 조금은 지루할 수 있지만, 지루함 만큼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미스터리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모두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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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책이야!
레인 스미스 글.그림, 김경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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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재밌다.
나는 재미있었다.
7살 먹은 세연이도 재밌다고 봤다.
시계를 곧잘 보게 된 세연이는 동키가 4시간 반 동안 책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는 동키가 게으르다며 큭큭 웃어댔다. (우리 세연이는 책이 재미없다 보다. 4시간 반 동안 자신을 사로잡을 책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메일도 트위터도 와이파이도 모르는 세연이도 이 책이 재밌다고 했다. 나는 더 재미있었다. 메일도 트위터도 와이파이도 줄 수 없는 책의 즐거움이,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동키와 몽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책은 ‘보물섬’이다.
아.. 보물섬.
아직 우리 세연이는 보지 못한 책, 그렇지만 아득히 먼 옛날 내가 봤던 책 보물섬.
짐과 실버의 우정.
정의로운 짐과 욕심 많은 실버의 운명의 엇갈림.
보물을 두고 벌어지는 해적과 신사들의 전쟁.

아득히 먼 옛날, 이 책을 보기 전에 잊혀졌던 그 옛날,
우리 엄마는 나에게 내일도 학교 가야 한다고 자라고 자라고 잔소리를 하셨고..
난 동키처럼 이 책에 빠져버렸다.
실버는 보물 지도를 뺏기 위해 짐의 우물에 독을 풀었고, 생존을 위해서 보물지도를 포기하려던짐의 일행은 때 마침 내리는 단비에 실버의 덫에서 빠져 나오는 그 순간, 그 순간을 읽기 위해서 스탠드 불빛을 이불로 가리며 늦은 밤 숨죽여 짐의 모험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던 그 순간으로 나를 데리고 가버렸다.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그 옛날의 그 순간으로 말이다.

8090 유행가를 들으면, 처음 그 노래를 듣던 순간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간다고 한다. 유행가는 기억 속의 타임머신이 된다고 하는데 책은 유행가보다 더 생생한 타임캡슐과 같다.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책은 고스란히 기억해주기 때문이다.  

아마존 서평에 보면 전자책을 즐겨보는 친구들과 21세기에도 종이 책이 지속될지 의심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고 써 있는데 나도 그렇다. 종이 책이 주는 즐거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이다. . 10.1인치 LED화면이 절대로 기억할 수 없는 내 어린 시절까지 말이다.
와이파이도 트위터도 페이스 북도 모르지만 동키와 몽키, 마우스의 재치 넘치는 대회에 7살 어린 세연이도 즐거워하면 본 책, 그리고 유년기의 내 모습과 조우하게 만들어 준 책..
100점 만점에 1000점을 준다고 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아름다운 책이다. 
 

그래, 바로 이 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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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을 발로 찬 소녀 1 밀레니엄 (뿔) 3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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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지.
밀레니엄의 마지막 소설, 리스베트의 끝, '벌집을 발로 찬 소녀'다. 밀레니엄의 첫 번째 시리즈 '여자를 증오한 남자'에서는 1,2권이 전부인데 반해서 두 번째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와 세 번째 '벌집을 발로 찬 소녀'는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다.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에서 궁금했던 점은 이 책에서 거의 대부분 모두 해결된다. 리스베트도 용맹한 자신의 캐릭터를 찾아가고, 슈퍼 블롬크비스트도 기자로서의 위엄과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준다. (그래도 무능하긴 무능해. 모든 문제를 우리의 리스베트가 다 풀어내지) 모든 캐릭터들의 생사가 결정되고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에서 벌려 놓기만 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마무리 하고 있다.

모든 문제의 중심인 ‘살라’ 그리고 그를 이용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권력을 가지고 싶어했던 사람들의 심판대에 오른다. 냉전시대도 끝났고 살라와 관련된 정보는 더 이상 일급 정보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로 인해서 행해진 공권력 남용을 숨기려는 옛 정보국 ‘섹션’의 사람들과 이를 밝히려는 리스베트와 밀레니엄 연합군(?)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된다.

과연 치열했을까?
치열할래야, 치열한 수 없는 싸움이다. 연합군(?)에겐 리스베트가 있다. 아날로그 세상에서는 ‘섹션’의 첩보 활동이 우세했을 지도 모르지만 냉전시대가 끝난 지금은 ‘디지털’시대다.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휴대폰으로 컴퓨터로 공유되고 있다. 스파이들도 어쩔 수 없이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고 그들이 컴퓨터에 로그인 하는 순간 승패는 결정된다. 리스베트는 3중, 4중의 방화벽을 뚫고 당신이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을 쉽게 침투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해커에게 컴퓨터만 쥐어진다면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을 보면서 통쾌했나? 아니
이 책을 보면서 재미있었나? 아니

이 책을 보면서 또 다시 답답했다.
두 가지 가정을 해 볼까?
아무리 억울했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1990년대와 같은 냉전시대였다면 리스베트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 때와 같이 정신병원에 갇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진실이 그녀의 편이었지만 권력을 ‘살라’의 편이었으니까. 21세기 권력의 모습을 변했고 리스베트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진실을, 권리를, 자유를 쟁취한다.

또 하나의 가정. 리스베트는 약자였을까?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을 때려잡는 이야기에 열광한다. 다윗은 우리와 다름없이 작고 연약했으며 그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꾀와 조약돌뿐이었다. 그런 다윗이 골리앗처럼 크고 강하고 권력 있는 자를 무너뜨리는 이야기가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는 ‘희망’ 때문이다. 작고 연약해도 영리한 머리와 진실한 용기만 있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교훈 때문이다.

그러나 리스베트와 블롬크비스트는 다윗이었을까?

리스베트는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법이란 모든 법에서 사람들에게 허용한 자유, 아무에게도 침해 받지 않고 적법한 절차를 취하지 않고는 엿볼 수도 없는 디지털 속 사생활 곳곳에 침투해서 사람들이 절대 들어내고 싶지 않은 비밀을 파고 든다. 물론 리스베트는 엄격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고, 힘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약하고 힘없는 피해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긴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사용하건 하지 않건 간에 나는 리스베트라는 영웅이 내 컴퓨터를 유영하며 무언가를 찾고 있을 생각을 하면 끔직하다. 이 사건도 애초에 리스베트가 블롬크비스트이 컴퓨터를 해킹해서 헤집고 다니지 않았다면, 동유럽 소녀들의 성매매를 다룬 다그 스베손의 리포트에서 ‘살라’라는 이름을 찾지 않았다면 어쩌면 발생하지도 않았을 사건인지도 모른다.

블롬크비스트는 그의 별명에서 알 수 있든지 언론계의 슈퍼맨이다. 무엇이든 사회의 취약한 점을 발견하면 맹견보다 더 강하게 물고 뜯어 진실을 파헤치고 만다. 생명의 위협과 맞서 싸워 얻은 자산, ‘신뢰’를 가지고 있다. 신뢰감 높은 언론인이 밝히는 ‘진실’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에서 용의자였을 뿐인 ‘리스베트’가 받아야 할 언론재판을 보며 언론이 한 인간을 얼마나 깊은 수렁을 몰아 넣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진실이었던, 아니었던 간에 말이다) 비밀을 파헤친 신뢰감 높은 기자의 힘이란 것은 대법원의 판결만큼 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냉전시대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섹션’의 사람들을 보며 그들은 힘없이 늙고 추레해진 골리앗이고 언론과 디지털이라는 신세대의 무기를 장착한 리스베트와 블롬크비스트는 자동화기로 무장한 다윗으로 보였다. 왜냐면 나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것을 해결한 언론의 힘도 디지털의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평범한 자에게 있지 않다. 모드 슈퍼맨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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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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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내가 바보가 된 줄 알았다.
스스로 독해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책을 읽고 작가의 이야기하고자 했던 주제를 집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의 끝에서 나에게 주어진 질문은 ‘대체 뭐냐, 이거? 대체 뭔 이야기야?’ 라는 어리둥절함 뿐이었다.

‘곤’은 아주 어렸을 때 죽을 고비를 넘긴다. 생활고를 못이긴 아버지가 곤과 함께 ‘이래호’에 뛰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고비를 상처로 이겨낸다. 귀 뒤, 목덜미에 깊게 패인 것과 같은 상처, 그러나 물이 닿으면 분홍색 속살을 들어내고 물 속에 녹아 있는 얼마 되지 않은 산소를 빨아드리며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얻는 ‘아가미’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아가미를 준 물은 ‘곤’에게 무시무시한 공간이다. 태초의 가족을 잃게 한 공간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가족인 ‘노인’과 ‘강하’의 목숨을 앗아간 공간이다. 그렇지만 그 무섭고 끔직한 공간에 ‘곤’은 뛰어든다. 상처에 굴하지 않고 상처 준 훈장과 같은 아가미를 통해서, 거친 물살을 힘차게 가르며 삶을 계속해 나간다.

자 이건 어젯밤에 이 책을 다 읽고 정말 모르겠는 소설을 밤새 부여잡고 스스로 생각해 낸 짜 맞추기에 불과하다. ‘상처’가 ‘아가미’가 되는 소설은 많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람’의 상처는 1억루피라는 ‘아가미’가 됐다. ‘바람을 만드는 소년’의 ‘브랜트’의 상처는 다른 이에게 힘과 용기라는 아가미를 선물한다. 그럼 ‘곤’의 아가미는??

곤의 아가미는 물론 휴대폰을 잡기 위해서 한강에 빠진 ‘해류’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한다. 그렇지만 그의 아가미는 그를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칭해준 ‘이녕’의 목숨을 빼앗고 노인과 강하의 삶 속에서 쫓겨난다. 또 우연의 중첩이긴 하지만, 결국 곤이 새로운 삶을 선물한 ‘해류’의 방문으로 인해 강화와 노인은 목숨을 잃는다. 결군 곤의 아가미는 스스로 인식하는지 모르지만, 다른 이에겐 불행이자 저주다.

세상의 물은 ‘이래호’ 뿐이었던 곤은 ‘강하(江河)’ 때문에 강으로 나서고, 또 해류(海流)와의 만남을 통해서 바다로 나선다. 곤이 자신의 아가미를 어떻게 받아드리는 지 잘 모르겠다. 그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는지 저주로 생각하는지... 이런 생각도 독자의 사치인가? 이런 생각도 없이 주어진 아가미를 그대로 받아드리며 만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바다를 힘차게 유영하고 있을 뿐인가?

이 책을 읽은(사실은 작가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상상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독해력이 부족해서인지 이 질문을 하고 나면 머릿속이 멍해지고 하얗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곤이라면.. 당신에게도 아가미가 생긴다면... 당신은 어떤 바다를 유영하고 싶은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읽는 2시간 동안 책에 매여서 쉽게 읽을수 있지만, 읽고 나면 대체 이 책이 뭐야,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뭐야 ?라는 내가 모자라서 못찾는 거야, 작가가 모자라서 못찾는 거야 라는 비아냥 거리는 질문이 하루 종일 떠나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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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5-05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미...가 퇴화된 건지, 그런 흔적 기관으로서의 아가미에게 다리는 무엇인지..
동화적인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좀 도식적인 소설이었죠.
글을 아주 잘 짚어낸 리뷰같네요. ^^

KNOCKOUT 2011-05-06 10:08   좋아요 0 | URL
저는 전작 '위저드 베이커리'가 너무 좋아서 한달음에 읽었는데 전작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샘님도 그렇죠?? ㅋㅋ

글샘 2011-05-08 12:44   좋아요 0 | URL
네, 딱 그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