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와 비밀의 부채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자마자 나는 컴퓨터를 부팅해 누슈를 검색했다. 누슈가 어떤 모습의 글자인지, 책 읽는 내내 궁금했다.



왼쪽이 내가 구글에서 찾은 누슈 문자다. 이 책만큼 아름답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자 한자대신에 한자의 모양을 빌어 만들어낸 표음문자라고 한다. 남성의 한자보다 간결하고 부드럽다.. 1950년대 이 문자가 발견되고 냉전이 치열했던 시대였던 만큼 첩보전의 암호로 오인 받고, 나리의 부족인 야오족의 방언임을 알게 된다. 1984년에 이르러서야 여성들의 글자라는 누슈라는 이름을 얻게 되지만 2004년 마지막 누슈 능통자가 사망하고 나서, 그 해석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설화’의 삶처럼 굴곡이 깊은 문자인 듯 싶다. 그러나 이런 배경 지식이 있건 말건, 이 책을 읽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나리와 설화의 아름답고 서글픈 우정이야기를 담아낸 ‘문자’라 관심을 갖게 된 것뿐이다. 이 책을 다 읽은 후의 느낌은 ‘즐겁다’ 다. 아주 즐거운 독서 여행이었다. 4시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즐거운, 그런 독서여행을 주었다.

난 ‘대지’의 작가 펄 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대륙을 파는 장사꾼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펄 벅이 중국에서 오래 살았고 또 중국을 사랑한다 손 치더라도, 그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 다만 펄 벅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미지의 땅을 서양인들이 보기 편하게 만들어 놓은 상품을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중국작가도 중국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살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떻게 결혼을 하며 어떤 삶을 사는 지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중국 작가들은 그런 의례가 아닌 중국인의 삶에 매달리는데 반해서 오로지 서양작가들만이 중국의 의례에 매달린다. 나는 그게 거슬린다. 중국인들의 삶이 왠지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눈요기 거리가 되는 느낌이다. 내가 중국인이었다면, 그래서 ‘대지’를 읽었다면 펄벅의 중국에 대한 이해를 감사하기보다 왠지 모욕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어떤 부분은 중국에 대한 몰이해로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 작가가 노벨상 수상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타민족, 타 국가의 이야기를 쓰는데 작가는 그리 용감할 필요가 없으며 쓴다면 그 민족과 국가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고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작가는 미국인(중국계라고 하지만)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아주 재밌다. 이 책은 다만 중국이 배경이었을 뿐, 우리네 할머니가 살았을 삶을, 혹은 우리 ‘여성’들의 삶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리’와 ‘설화’의 서글픈 인생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 이야기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P. 52
당시에는 알지 못했었다. 내 작은 발은 미래의 시댁 사람들에게 출산의 고통뿐만 아니라 어떤 불행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나의 자제심과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터였다. 또 내가 친정 식구들, 특히 친정어머니에게 순종했음을 보여줌으로써 장래 시어머니가 될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게 될 터였다. 또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내가 수를 놓은 신발은 장래 시댁 사람들에게 자수 솜씨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 일에 대한 내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이 될 터였다
.

나리가 전족을 하면서 알게 된 여성 삶의 현실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자신이 처하게 될 처지. 7살 어린 나이에 발가락 뼈를 부셔 7cm의 작은 발을 갖게 되면서 얻어야 할 가치. 자유를 포기하면서 순종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어린 소녀. 그렇지만 그 소녀는 순종에 머리를 조아리는 대가로 영혼의 친구를 얻는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 부모나 남편도 줄 수 없는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염려하며 마음을 나누고 위로를 얻는 관계, 바로 라오퉁이다.

P65
“착한 섬풍과 여자의 도리를 배우는 소녀가 있다고 들었어. 너와 나는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다지. 우리가 서로 단짝이 될 수 있을까?”

P69
우리 만남이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어. 네가 쓴 말들은 내마음을 채우고, 우리는 한 쌍의 웡앙새가 되겠지. 우리는 강 위에 걸린 다리와 같아.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 둘 사이를 부러워할 거야. 그래, 내 마음은 진실로 너와 함께 하겠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리’지만, 나리를 통해서 영혼의 단짝(라오퉁)인 설화의 인생이야기를 담고 있다. 설화는 아주 부잣집 아가씨로 태어난다. 부자 3대 간다는 말이 없듯 그 아버지는 무능력했고 마침내 아편에 빠져들었다. 그런 설화의 삶을 붙들어 맨 건 ‘나리’와의 우정을 통해서다. 우리로 말하면 몰락한 양반집 자손 나리는 천한 농부의 딸 ‘나리’와 라오퉁을 맺게 되고 그녀에게 여자들의 글자인 누슈를 가르쳐 주고 나리에게서 살아 남는 법을 배우게 된다.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 베를 짜고 수를 놓고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는, 너무나 사소하고 현실적인 어떤 것을 배운다. 자신보다 더 부자고 나은 집에서 자라 세련된 취향과 지식을 가지고 있던 설화는 나리에게 보물 그 자체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집에 오는 날만을 기다린다. 지루한 일상이 계속되는 어린 시절, 나리는 기다림의 설렘을 배우고 누슈 문자를 통해서 친구와 소통하는 법을 알게 된다.

P104
우리가 우슈의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녀가 남들 보기에 행복하고 화려한 생활 뒤에 숨겨진 아픔을 누군가와 공유할 방법을 찾았다는 거야.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선물이 수많은 세대를 거쳐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란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리는 다른 여자와 다르고 또 다른 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빛나던 유년시절은 쉽게 끝나버리고 설화와 나리의 운명은 달라진다. 아름다운 발을 가진 나리는 부유한 루집안으로 시집을 가 그녀의 운명을 예언한 점쟁이의 말처럼 축복된 삶을 살게 되고 설화는 백정의 아내가 되어 구박과 핍박 그리고 학대를 받게 된다.

P343
나는 그들과 함께 수를 놓고, 힘들 때는 서로 위로해주지. 그들은 나를 동정하지 않다. 내가 잘 지내지 못할 때는 나를 찾아오기도 해… 나는 외롭고 혼자니까. 나는 너처럼 정해진 시간에만 와서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일 위로해줄 여자들이 필요해. 내가 옛날에 어땠으며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나를 봐주고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 나는 홀로 날고 있는 새가 된 기분이야. 난 짝을 찾을 수가 없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고 그 노력을 보상받은 나리는 설화에게도 사랑 받기 위해, 더 노력하라며 설화를 벼랑 끝으로 몬다. 그러나 설화는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나리의 충고를 묵묵히 따르며 헌신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P361
설화는 라오통으로 마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어요. 하지만 마님은 너무 남자처럼 생각했죠. 오직 남자의 규칙에 서서 설화의 가치를 평가하고, 남자가 사랑하듯 설화를 사랑했어요”


뒤뚱거리는 몸짓이 남성을 자극한다고 해서, 혹은 멀리 걷지 못해 비참한 현실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중국인들은 ‘전족’을 한다고 한다. 어린아이의 발을 붕대로 칭칭 동여매 발가락 뼈를 부러 뜨려 남자의 한 손에 쏙 들어가게 끔 작은 발을 만들어내는 야만적인 풍습. 이 책을 주인공은 형벌처럼 내려진 삶에 머리를 조아리며 순응한다. 그렇지만 참는 것이 넘쳐 흐를 때 여성들만의 문자인 ‘누슈’를 빌어 남자들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삶의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을 적어 라오퉁에게 보내 감정을 나눈다. 그것만이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다.

진실한 친구 세명을 가졌다면 성공한 인생을 산다고 했는데, 설화가 나리에게 베푼 굳세고 질긴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세 명은 너무 많다고 할 지 모른다. 단 한 사람이 끝없고 흔들림 없는 우정만으로도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그리고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은 나리가 얼마나 서글퍼했는지.. 이 책을 통해서 느껴봤으면 좋겠다.

역시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남자들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아서도 안 되는 누슈 문자처럼 남자들은 별로 감동적이지 않을 책. 그러나 여자라면 그것이 열 일곱 소녀부터 여든 살의 노인까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모진 세월을 견뎌내고 있는 모든 여자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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