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ㅣ 민음의 시 131
김소연 지음 / 민음사 / 2006년 1월
평점 :
빈 살림망을 들고 우리는 낙조 앞에 서 있었다
어망을 던져 어망을 포획하는 고깃배와 같았다
자기 생을 낚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자기 몸을 꺼내어
떡밥처럼 매단 것과 같았다
행복한 봄날
너의 가시와 나의 가시가
깍지 낀 양손과도 같았다
맞물려서 서로의 살이 되는
찔려서 흘린 피와
찌르면서 흘린 피로 접착된
악수와도 같았다
너를 버리면
내가 사라지는,
나를 지우면
네가 없어지는
이 서러운 심사를 대신하여
꽃을 버리는 나무와
나무를 저버리는 꽃 이파리가
사방천지에 흥건하다
야멸차게 걸어잠근 문 안에서
처연하게 돌아서는 문 밖에서
서로 다른 입술로 새어 나오는 한숨이 있었는데
흘리는 눈물의 연유는 다르지 않았다
꽃봉오리를 여는 피곤에 대하여도
이 얼굴에 흉터처럼 드리워진
나뭇가지 그림자에 대하여도
우리의 귀에 새순이 날 때까지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누군가 두고 간 우산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저녁을 기다리자니
몸 늙는 대로
마음 늙기를 원해 보네
마음 가는 곳에 몸이 가 있어야 했던 청춘은 그러나 노예처럼
이 청승. 이 청승의 상쾌함. 가구도 없는 마루의 청승.
한밤중에 빨래를 개는 청승. 벽지에 박힌 작은 곰팡이들
이 밤하늘의 별자리로 보이는 청승. 애국가를 끝까지 듣
고는, 테레비 외부입력 푸른빛을 쬐고 앉은 이 청승. 나
는 무릎을 감싼다. 마루 끝에 앉아서. 읽었던 소설을 또
읽으며.
*시집 제일 뒤편에 실은 저자의 산문 「그림자論」 이 제일 빛나는 글이 아닐까 싶다
-------------------------------------------------
까무룩까무룩 조는 듯 인생의 한순간이 지워져간다
소박한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지난날 품었던 벅찬 느낌의 눈길로 쓰다듬어 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시 나부랭이나 들추는 한량같은 시간은 어디선가
뭐가 처박히고 추락하는지 분분하기만 하다
봄끝에 꽃 다 떨어져 풀죽은 나무처럼 마음도
헛헛하게 지워져서 없어질 날만 기다리는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