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는 둥둥 창비시선 265
김승희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승희를 읽는 일은 괴로운 즐거움이다 김승희의 시를 읽어나가는 것은 명쾌한 심해로 하강
하는 일이다 그는 뚜렷한 장면을 선사한다 그가 벼르고 별러 직조한 시들을 읽어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를 읽어야만 한다 더 깊고 어둔 것들을 보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는 아직 푸르스름한 깊은 곳에 머무를 수 있는 까만 무거움을 견디고 있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랩소디 인 블루

언젠가 나는 죽어 있다
오랫동안, 나는 죽어 있는 데 익숙하다
나는 내가 있는 어디에서든
수년간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든
내가 죽어 있다는 데
동의한다
수천년 뒤 텍사스의 어느 사막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으로 나는 되돌아온다
나의 시선은 그 커다란 하늘과 지평의 사막에다
무궁한 랩소디 인 블루를 그린다
그러한 우울의 무궁동
수천년 같은 랩소디 인 블루를 그려야만 할
우울과 비애가 나에게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언젠가 나는 죽어 있고
언젠가 나는 그렇게 죽어가면서 살아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하늘이나
마르크 샤갈의 거꾸로 선 신부의 환상 속 기절에서나
그런 곳에서부터
갑자기 블루는 굴러떨어지고
횡격막 아래 부상을 입은 비애의 첼로처럼
부상당한 블루를 질질 끌면서 절름대며 점 점 점
푸른 깃털을 떨어뜨리며 둔주하는 담쟁이덩굴
랩소디 인 블루
블루 속에 묘혈을 점 점 점 식목하며
진정한 시인이란 도망가는 사람이라고
진정한 사랑이란 도망뿐이었노라고
나의 가슴은 모든 어둠의 토지
빛과 나의 핏줄은 끊어지는 법이 없는 것
나의 가슴은 그렇게 모든 어둠의 토지
수천년의 랩소디 인 블루가 끌고 가는 힘겨운 상승 완만 곡선




심장딴곳증(ectopia cordis)

인어가 물 밖으로 나와 걸어가는 것처럼
우리가 땅 위를 걸어갈 때
물 밖으로 나와 방울방울 피를 뿌리며 걸어가는 모든 해저의 것들에 대해
안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나올 수밖에 없었던
기막히게 아픈 심장 같은 것에 대하여
나는 노래하고 싶다
심장은 결국 하트 모양이 아니었고
차라리 피투성이 근육덩어리였다
어딘지 정육의 냄새가 풍겼다,
터널처럼 내 육체는 그만 아픈 심장을 견디다 못해 방출하였고
밖으로 쫓겨난 심장은
이제 비밀한 단 한사람조차 숨겨줄 수 없게 되었을 때
구태여 물 밖으로 나와 걸어가는 인어라든가
샤갈의 그림 밖으로 끌려나와 바위에 머리를 박고
여지없이 중력에 추락하는 푸른 신부라든가

-일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