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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외롭고 높고 쓸쓸한 - 시인 백석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이덕무
다들 외롭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고 편리를 위해 저 낮은곳으로만 가기 바빠 줄달음
치는 세상에서 이 선비의 말과 글을 읽고 있노라면 지하철 문이 열리고 우르르 몰려
가는 대열을 무조건적으로 따라가 마치 공장 컨베이어벨트 위의 물건들처럼 에스컬
레이터로 운반되어지는 아침나절의 우울한 풍경은 과연 내가 성취코자 하는게 무엇
인가 그것이 어디에 있길래 이런 길을 가고 있나 그런 생각마저 든다
쓸쓸함 따위의 감정은 헌신짝 버리듯 갖추고 있어선 안되는 것인냥 하는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한번 자신을 다잡는 시간은 혼자일 때라야 가능하고 그런걸
쓸쓸하다라고 하면서 도피하거나 회피하려들지만 그래선 안된다. 자발적인 쓸쓸함에
익숙해져보면 사람들 속에 갇혀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마련이다. 그렇듯
쓸쓸함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보고 아마도 그 사람
도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싶지만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나를 알아주는 벗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일 것이다. 10일에 한 가지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 가지 빛깔을 물들일 수 있으리라.
이것을 따뜻한 봄볕에 내놓고 말려서 여린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달군 금침바늘로 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그런 다음, 고운 비단으로 장식하고 예스러운 옥으로 막대를 만들리라.
이것을 가지고 뾰족뾰족하고 험준한 높은 산과 세차게 흐르는 물이 있는 곳, 그 사이에 펼쳐놓고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 때면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벗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어째서 이런 지극한 즐거움이 드문 것인가.
이러한 즐거움은 일생에 단지 몇 번 찾아올 뿐이다.
... 내 웃음 속에 감춰둔 날카로운 칼과 마음속에 쌓아둔 만 개의 화살, 그리고 가슴속에 숨겨둔 서 말의
가시가 일시에 깨끗이 사라져 한 가닥도 남지 않는다.
『한서』와『논어』로 병풍과 이불을 삼아 한겨울 밤을 나는 장면이나 영양실조로 여동생을 일찍 보낸
그의 가슴속에 어떤 감정이 실려 있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서얼 출신이라는 태생적인 한계와
그로인한 빈한함에서 오는 장남으로써의 책임감을 다하지 못하는 자괴감이 그 자신 속에 숱한 응어리를
쌓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일생은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당당하고 꿋꿋했다.
요즘 세상에도 이덕무 처럼 인생을 건너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가 다 바보라고 손가락질하겠지.
그렇다하더라도 이백여 년 전에 살다간 이덕무 같은 발자취를 흉내도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우왕좌왕
하는 건 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