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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ㅣ 민음사 세계시인선 38
E.디킨슨 지음, 강은교 옮김 / 민음사 / 1997년 1월
평점 :
품절
소박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소박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인간의 가슴은 듣고 있지
허무에 대해-
세계를 새롭게 하는
힘인 <허무>-
『허무집』의 시인이 옮긴이라서 이 시가 앞쪽에 배치된 것인가 ㅋㅋㅋ
얼마나 많은 허무가 범람해야만 이 세계가 새롭게 되는 것인지, 무엇으로 빈 것과 빈 것들을
차곡차곡 쌓을수 있는지, 그리하여 세계를 새롭게 한 그 다음은? 다시 허무로 되돌아가는 건가
크나큰 고통이 지난 뒤엔
크나큰 고통이 지난 뒤엔, 의식처럼 찾아오는 느낌-
마치 무덤처럼, 신경들은 엄숙히 가라앉고-
얼어 버린 심장은 질문하네, 바로 그였느냐고, 고통했던 이가,
어제, 아니 수세기 전부터?
발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네-
땅 위건, 공중이건, 아니 허무 속이건-
멋대로 자란
숲길,
수정처럼 명징한 쾌감-
이것이 선각자의 시간-
기억해야 하리, 끝내 살았다면,
냉동되는 인간이 눈雪을 상기하듯-
처음엔- 오한이 나다가-이윽고 황홀-이윽고 해방이 오는 것을.
아직 그 황홀의 경계선 까지는 가지 않았겠지만 한번씩 조금이라도 앓고난 후 드는 느낌이
그런 것일까. 스치듯 지나가는 훌훌 털고 일어나는듯한 해방감. 무거운 몸으로 부터의 해방.
무조건적인 중력으로 부터의 탈출. 모든 인위로부터의 단절. 거의 무의식에 가깝게 교육된
의식적인 행위들에서 오는 부자유와 인간적인 굴욕의 수순.
내 죽어서 웅웅대는 한 마리 파리 소릴
내 죽어서-웅웅대는 한 마리 파리 소릴 들었네-
방안에는 고요
마치 끓어대는 폭풍 사이-
허공의 고요와도 같이.
사방에서 눈眼들은-싸늘하게 비틀어대며-
숨결은 죽음의 왕이 지켜볼
마지막 한순간을 위해
굳어지며-방안에서
난 내 유물들을 나누어 주었네-
양도할 내 몫에
사인하여- 그러자 거기
날아드는 파리 한 마리-
우수에 잠겨- 불확실하게 비틀비틀 웅웅대며-
빛과 나 사이에서-
이윽고 창은 닫히고- 이윽고
아무것도 난 볼 수 없었네-
그나마 이런 안녕은 다행한 안녕이 아닐까
아무도 지켜봐주지 않는 불행한 안녕들 도처다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난 걸었네.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로 머리맡에는 별
발 밑엔 바다가 있는 것같이.
난 몰랐네- 다음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는지-
어떤 이는 경험이라고 말하지만
도무지 불안한 내 걸음걸이.
몇 발자국 안가면 끝나는 널빤지를 가야하는데
그 밑에는 굶주린 악어가... 쉴새없이 돌아가는 시계바늘이 뒤에서 자꾸만 찔러대고 있어
불안과 절망의 널빤지 위에선 자의 이름이 바로 인생이도다
신발
길 위에 홀로 뒹구는
길 위에 홀로 뒹구는
하찮은 돌멩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성공을 걱정하지도 않으며
위기를 결코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그의 코트는 자연의 갈색,
우주가 지나가며 걸쳐 준 것
태양처럼 자유로이
결합하고 또는 홀로 빛나며,
덧없이 꾸밈없이
절대적인 신의 섭리를 지키며-
언젠가 누가 내게 물어서 답한 말
만약에 다시 세상에 와야 한다면 돌멩이면 좋겠네
오랫만에 펼쳐들어봤더니 예전에 감응하지 않던 문장들을 재발견하곤 한다
이렇듯 뭔가를 읽고 감응하고 써보는 행위에서 받을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래봤자
지구 바깥 저 껌껌한 우주에서 바라보자면 먼지같은 한 개인의 인생사가
골몰하는 생각 안에서는 전 우주보다 복잡다단하기만 한 지경 속에서도 읽으나마나한
허무한 책보기에 티끌만큼의 위로를 기대볼까 싶지만 이미 허무가 너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