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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
페터 슈탐 지음, 임호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평점 :
신기한 일이다. 내 생애에서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해들이, 흔적 없이 지나간 것 같은 해들이 있다는 게 말이다. 심지어 내 생애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사건,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 기억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런 사건은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없었고, 거기에 관여하지도 않은 것같이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하찮은 사건,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건이 20년, 혹은 30년이 흐른 어느 날 마치 내가 방금 경험한 사건처럼 생생하게 기억날 때가 있다.
_177p
문득문득 느껴지는 기시감의 순간들이 있다 그런 기시감과 더불어 어떤 순간엔 알 수 없는 막연한 예감에 휩싸여 이미 어찌할 수 없는 미래가 있는 것인가 하는 때도 있다
시간이 흘러 결국 실현된 그 예감의 한가운데 있음을 자각할 때면 인간의 수많은 발버둥은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만 하다
소설에는 작중 화자 크리스토프와 그의 20년전 연인 막달레나 그리고 레나와 그의 연인 크리스가 등장한다
크리스토프 : 크리스, 막달레나 : 레나
두 커플의 비슷한 이름에서 작가가 의도하려는 바가 살짝 엿보인다
이 소설과 직접적 연관성이 있을진 모르겠으나 장자의 호접지몽이나 영화 매트릭스 또는 빽투더퓨처를 보며 생각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과연 인간의 운명은 미리 결정되어 있을까 아니면 자유의지(라는 것 조차 허용된 선택의 범위 안인 것일지도)를 통해 인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일까 아울러 내가 나라고 여기는 나는 진짜 내가 맞는 것일까 등등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930/pimg_7209121834034661.jpg)
차이가 있소, 편차가. 오류들이 있지. 우리의 삶을 우선 가능하게 하는 비대칭들 말이오. 언젠가 물리학자와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소. 그 사람 설명에 의하면, 전 우주는 작은 오류, 즉 물질과 반물질 사이의 작은 불균형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오. 이런 불균형은 틀림없이 빅뱅 때 생긴 거라고 하오. 이런 오류가 없었다면 물질과 반물질은 이미 오래전에 상쇄되어 우주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거요. 그렇담 아주 작은 오차가 배가된다는 말씀 아닌가요?
_91p
이런 문장이 가능한 것은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세른CERN에 관한 "인사이드 세른"(열화당 2018)의 공동 저자로 페터 슈탐이 참여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궁극적으로 페터 슈탐이 이 소설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연인들의 안타까운 사랑이라는 표면적인 이야기가 당연히 전부는 아닐테다
칼 세이건의 표현처럼 대우주의 한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에서 스치듯 찰나를 살다가는 인간의 부질없는 외로움의 발버둥으로 읽는다해도 무리는 아닐듯 싶고
나는 내가 살아왔고 내가 기억하는 삶에 대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_122
현대 과학의 주장대로 빅뱅으로 부터 시작된 우주와 어쨌든 그 우주의 미세한 부산물인 각 인간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어디부터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을까
'범아일여'라는 불교적 세계관을 작가와 함께 이 소설에 대입해 이야기해 본다면 즐겁겠다 싶다
소설의 제일 마지막 37장에서 쓰러진 노인을 양로원으로 부축해 주고 난 후의 내용은 소설의 제목 "다정스러운 무관심"이란 느낌이 잘 응축된것 같아 소설을 마무리 짓는 장이면서 동시에 어떤 열린 느낌이라 좋았다
아울러 과대 해석에 지나지 않겠지만 부축 받은 노인이 곧 크리스토프의 미래 도플갱어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으려나 싶기도 했다
앞서 말한 모든게 오독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 오독으로 인한 나름의 이런저런 상념을 놓고만봐도 의미있는 일독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페터 슈탐이란 작가를 알게 되어 아직 미번역된 작품들도 번역 되어 페테 슈탐 전작 읽기가 가능하게 되기를 희망해 본다
세상의다정스러운무관심_서평단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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