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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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이 날아갈 정도의 바람이 불어요

제비 목소리로 귀는 막겠지만

밤엔 지붕이 있는 거나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눈을 뜬 거나 감은 거나 마찬가지로

어두워요


어두운 건 밤의 장점이에요


깊은 맛이라는 개념은 얕은 물에만 있는 것 같아요

_일부



오늘은 바람이 미친듯이 하루종일 불고 있다 어두운 밤이 되어서도 바람은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바람소리는 창밖에서 더 기세를 올리고 있다

바람하면 떠오르는 건 제주다

내가 제주에 관해 가지고 있는 기억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바람에 관한 것이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완만한 내리막을 가고 있었는데 제주의 바닷바람에 자전거가 내려가지 않고 심지어 위로 밀려 올라갈 지경이었으니 그 기억은 쉽사리 잊힐 게 아닌 것이다

진짜 지붕이 날아갈 정도의 바람이 제주에 자주 불 것은 팩트인 것이고 이 표현은 시적으로 과장된 것이 아닌 것이고 제주에서 생활해본 사람의 솔직한 경험이란 것이다

제주와 바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일텐데 시집을 읽다가 그 바람이 등장하는 바람에 리뷰의 시작이 바람이야기가 되었다






시인 이원하는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할 당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등단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이제 총 54편의 시가 담긴 첫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최근 읽어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시인의 첫 시집을 읽는건 흥미로운 일이다


어깨너머로 듣기로 시인의 이력이 다소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들었다

일반적인 국문과나 문창과 출신도 아니며 작가를 꿈꿔왔던 문학소녀도 아니었다고 한다

미용고를 졸업해 미용실 스태프로도 일하고, 영화 <아가씨>에 뒷모습이 살짝 등장하는 보조 연기자로 출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이력을 들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시인의 시는 상투적 표현이 되겠지만 새로웠다.

일단 표제작이자 등단작을 한번 읽어 보고 이야기 해보자.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라 고백한 시가 뽑혔을 때, 문단은 대체 이런 시인이 어디 숨어 있다 나타났냐며 술렁댔다. 이 놀라운 신인은 데뷔 첫 해 문예지 등의 청탁만으로 44편의 시를 지었고 출판사 사정으로 1년 늦춰진 걸 감안해도 데뷔 2년만에 첫 시집을 내놨다. 첫 시집은 출간 일주일 만에 벌써 3쇄를 찍었다.


_한국일보 2020. 4.23



일단 시집을 펼쳐 차례 페이지를 보면 페이지를 잘못 펼쳤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시들의 제목이 길어서 그 자체가 한편의 시인가 싶은 시각적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차례는 그렇다 치고 많은 시들이 경어체를 쓰고 있다. 경어체로 끝나는 시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원하의 시들은 그럼에도 경어체이기 때문에 더 맛이 사는 것 같아 경어체여야만 하는 것이란 걸 읽으면서 느끼기도 했다

4부로 나뉜 구성에 각각의 부제목이 ’ ‘’ ‘’ ‘이다. ‘새싹눈물로 읽을 수도 있고 새싹눈물로 읽어도 되는 부제목들이다.



욕심 같아서는 수십 편의 시들을 많이 소개하고 싶다. 그만큼 오랜만에 아주 흡족한 시집을 만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고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역시 시집을 직접 손에 쥐고 읽어보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 인상적인 부분을 아껴 소개해 보도록 한다.



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

아파도 도달해야만 하는 지점을 기억하는데

나는 자꾸만 때를 미루고 있습니다

치과나 병원이면 이렇게 미루지 않았을 겁니다

차오르다 차오르다 뚜껑만 닫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됩니다


손수건 한 장이 나를 안쓰러워합니다


손수건 한 장은

아슬아슬하고 별것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내일도

바다가 나를 채갈 겁니다

자꾸 울면

내 눈에만 보이던 게

내 눈에만 안 보일 겁니다


_<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부분



코스모스가 회복을 위해 손을 터는 가을


/.../

휘둘리며 사는 삶에는

애초에 비스듬하게 서 있는 것이 약이니까요


_<코스모스가 회복을 위해 손을 터는 가을> 부분



29에 등단하고 지금 서른 초반의 시인이 지어내는 시와 그 행과 행간에 숨겨놓은 여백들에 나는 새삼 놀란다. 시 전체를 읽어야 맥락을 보고 제대로 느끼겠지만 궁금하다면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든 주문 버튼을 누르자.

시인의 간단한 프로필 이외에 개인사를 알 수는 없고 쉽게 쓰여지는 시는 없겠지만 어떤 한 문장과 그 문장을 이루는 낱말과 그리고 띄어진 공백들이 채워지는데는 쉽지만은 않았겠구나 짐작해 본다.


시집 제목을 의심하지 않은 당신이라면 시인이 제주에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시집을 읽었을 것이다. 이 시집엔 제주에서 생활해봐야만 쓸 수 있는 시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원하 시인은 첫 시집을 낼 때까지 제주에 머물 작정이라고 했다.


도시로 돌아오면 시가 망할 것 같아요. 시로 쓸 색()이 없어서요. 저에게 시는 삶이에요. 보고 겪은 것만 시로 쓰거든요. 제가 걸어가지 않으면 시도 멈춰 버려요.”

사실은 술이 세요. 소주 두세 병 마시면 기분만 살짝 좋아져요.” 어쩐지 배신감이 든다. “시로 엄살을 부려 본 거예요. 지난해 5월 혼자 제주로 이사했는데 너무 힘들었거든요. 벌레가 너무 많아서요. 벌레 발 소리에 잠에서 깰 정도였어요.”


한국일보 인터뷰 2018.2.13.


첫 시집이 나온 지금 시인은 제주에 살지도 않고 사실 술도 좀 세다고 한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시인은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면 부다페스트로 떠날 예정이라고 하며 조만간 시인의 산문집이 출간될 예정이라고도 한다.

장담까지 아니더라도 현재 대중 독자들과 평단으로부터 가장 각광 받는 시집이자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제주를 떠나 부다페스트로 갈 예정인 시인이 다음 묶을 시집에 과연 어떤 제목을 지을지 그리고 어떤 시들이 지어질지 시집을 읽은 독자라면 나와 비슷한 생각이지 않을까 한다. 한 편을 더 읽어 본다.



싹부터 시작한 집이어야 살다가 멍도 들겠지요


낑깡을 얼마나 크게

한 입 베어 물어야

얼떨결에 슬픔도 삼켜질까요


그리고 어찌해야 그 슬픔은

자신이 먹혀버린 줄 모를까요


노을이 추운지

희끗희끗 몸을 떠네요


떠는 건 진심이지요

겨울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요

생각으로는 어찌 될 수 없는 일이지요


이렇게 횡설수설하며 걷다보면

횡설수설을 들려주고 싶은 집 앞에

도착하지요


집 앞에 서니

집이 참 멀어 보입니다


진심이란, 집 안에 없고

내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집이 여전히 멉니다


진심은 없던 일이 될 수 있지만

집은 그럴 리 없어서지요


싹부터 시작된 집이 있다면

내가 원하지만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나아요


싹부터 시작된 모든 것들은

온종일 곁에 두면 서로 멍만 드니까요


시 전체가 좋아서 읽어 본 것이지만 특히나 다음의 연이 오래 남아 있다.


떠는 건 진심이지요

겨울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요

생각으로는 어찌 될 수 없는 일이지요


/.../


싹부터 시작된 모든 것들은

온종일 곁에 두면 서로 멍만 드니까요



겨울에 우리가 흔히 개 떨듯이 떨다 왔다고 한다. 그렇게 겨울에 개 떨 듯이 이를 부딪히며 떨어본 사람은 안다. 일부러는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그 떤다는 것을 진심에 비유할 수 있는 시적인 감각이나 삶의 그런 순간을 시로 옮길 수 있다는 건 나는 단순 글쓰기를 잘한다고 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연에서 온종일 곁에 두면 서로 멍만 드는 사이를 싹부터 시작된 모든 것들이라고 하며 관계에 대해 보이는 회의적 시각은 시인의 인생 가운데 어떤 그늘에서 비롯되었을까 싶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시의 어떤 문장이나 몇몇 연을 읽다가 읽기를 멈추게 하는 시들이 많다면 그 시집은 자기 자신과 코드가 맞는 시집일 것이다. 그렇게 한 시인의 중독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시집에 대한 느낀점들을 이야기해보았는데 이것은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이렇게 딱 꼬집어 말하고 싶은 부분들과 그 부분들이 모인 시가 그야말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는 시집이기 때문에 호들갑스럽게 소개해 보았다. 당신들도 한번쯤 만나봤으면 하는 시집이다.

언제나 그렇듯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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