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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1. 왜 읽었냐
2. 작품에 대하여
2-1 형식 또는 구조적인 면에서
2-2 내용적인 면에서
2-3 표지와 제목에 대하여
3. 그럼에도
이 작품을 왜 읽게 되었는지 주변 이야기를 해보고 다음으로 작품의 내외부적인 면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이 작품을 추천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며 마치게 되겠다
1. 왜 읽었냐
2019년의 노벨 문학상은 다른 해보다 좀 더 관심을 끌지 않았나 싶다.
발표가 연기된 전년도의 수상자와 함께 동시에 두 명의 수상자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2018년 수상자로 국내에는 생소한 폴란드의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 <<방랑자들>>을 읽어보았다.
좀 삐딱한 승질머리에서 나온 편견 때문인지 다른 상보다 특히나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은 일부러 읽지 않는 편이었으나 먼저 읽은 지인의 리뷰를 보고 이건 한번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막상 집어든 책의 600페이지라는 두툼한 두께감에 처음에 놀랐고 차례 페이지에 빼곡하게 나열된 120개의 소제목 개수에 두 번째는 뜨악했다.
600/120 = 5
산술적으로 따져보자면 한 꼭지당 5페이지라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무슨 이야기가 될까 싶은 의구심이 읽기 전부터 들었다. 물론 기계적으로 5페이지씩 쓰여지지는 않았다. 어떤 건 중단편으로 묶어도 될만한 분량이었고 그만큼 다른 건 기껏 몇 문장도 되지 않는 한 페이지짜리도 있다. 거기에 본문에 삽입된 지도가 12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2008 니케상
2018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2018 노벨룬학상
이 작품은 2007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2008년 폴란드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니케상을 수상하고 2018년에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까지 수상한데 이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는 근사한 권위까지 갖추게 되었다. 작가 프로필을 살펴보니 여러모로 상복이 많은 작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만한 작품을 써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작가와 작품의 수상 이력을 지우고 이야기한다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상의 권위에 눌려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전세계적으로 인정된 작가의 작품에 대해 겐지스 강가의 모래 한톨도 되지 않을 한 독자의 어설프고 설익은 이 품평이 작품에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2 작품에 대하여
총평부터 해보자면
파편적인 몇몇 단편들과 아포리즘적인 어떤 문장들은 빛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모두를 잘 꿰어서 한 편의 완성된 큰 그림으로 봤을 때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나는 잘 볼 수 없었다.
어리석은 나는 이 작품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파편화된 비만 소설이라고 하겠다.
2-1 형식 또는 구조적인 면에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120개의 소제목이 있고 그만큼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의 다양성이라는 면에선 호평할 수 있고 통일성이나 일관성 면에선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독자의 성향에 따라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리는 부분이 아닐까 싶고 나는 부정적으로 읽혔다.
600페이지 가운데 300페이지가 넘어갈 즈음 도대체 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싶어 뒤편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기도 했다.
<<방랑자들>> 이라는 한 권의 소설이 어떤 작품이란 게 희미하게 짐작 안가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형상화 시켜 독자들에게 들이대야 하는 게 작가의 일이라면 그 일은 좀 나태했거나 나 같은 아둔한 독자가 읽어내기에는 문턱이 높은 소설이 아닐까 한다.
두세 꼭지로 나누어 쓴 것들을 하나로 합치고 내가 보기에 필요 없다 싶은 꼭지들을 쳐낸다면 분량적으로 2/3 또는 1/2까지 소설의 다이어트가 가능하지 않나 싶다. 소설의 뼈대만 간신히 추려낸 레이먼드 카버의 편집자라면 과연 어느 정도 추려낼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참고삼아 찾아본 한 페이지짜리 꼭지는 대략 24개였다.
소설을 어느 정도 읽어본 독자라면 이런 식으로 조각조각난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형식의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쯤엔 하나의 완성된 어떤 이미지가 생성되면서 해당 작품은 어떤 작품이었다는 큰그림으로 남으리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나 역시 그랬다. 다 읽어갈 즈음엔 뭔가 있겠지 인내심을 발휘하며 읽어 나갔다. 100여 개의 이야기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건 고작 서너 편이 될까. 특히나 공을 많이 들인듯한 인체 해부에 관한 역사와 세부 묘사의 부분은 결과론적으로 건너 뛰고 싶을 만큼 읽고 싶지 않은 성격의 내용이었다. 불멸에 가까울만큼 사후 인체 보존 기술을 통한 영원성을 이야기 하면서 작품의 주제와 대비시켜보자는 게 작가의 의도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좀 별로였다.
제목을 직접 말하지는 않겠지만 아주 ‘쇼킹’한 결말의 해당 꼭지는 인상적으로 읽혔다. 일정 정도의 분량이 되는 것들만 묶는게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더 쉽고 충분하게 의도가 전달되지 않을까 싶다. 뜬금없는 한두 페이지 짜리 메모와 비슷한 글들이 오히려 작품의 의도하는 바를 흐리고 있는게 아닌가 한다. 물론 한 편의 소설 안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이 안들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일품 요리가 됐든 잡탕이 됐든 그것대로 맛이 있는 것인데 아무리 잡탕이라도 그 비율에서 오는 맛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취향에 따라 뷔페에 대한 호, 불호는 갈릴 수 있다. 나는 뷔페에서 뭘 먹고 계산을 하고 나오면 메인 요리가 없이 이것저것 많이 먹긴 했는데 도무지 뭘 먹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이 <<방랑자들>>이라는 소설이 거기에 해당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사방 팔방 옛날부터 요즘까지 흩어져 있을뿐만 아니라 주인공도 딱히 없는 소설을 읽고보니 도대체 뭘 읽었나 싶다 그 말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에 토를 단다는 게 웃길 수도 있고 작품 하나를 읽고 왈가왈부 한다는 것도 이른 감이 있다는 것은 안다만 이런 볼멘소리를 하지 않고 좋은 게 왜 좋은 것인지를 이야기 하기엔 내 소양이 부족하다.
2-2 내용적인 면에서
소설을 읽기 전에 원제목의 단어를 검색해 봤다
Bieguni
이 단어가 무슨 뜻인가 구글 번역기를 돌려봤으나 번역되는 뜻은 없었다
그 뜻은 옮긴이의 말에서 알 수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소설의 제목은 고대 러시아 정교의 한 교파인 ‘달리는 신도들’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들은 온갖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정체되거나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고 장소를 바꾸는 것만이 악을 쫓아낼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_609p
그리고 작가가 직접 밝힌 <<방랑자들>>을 쓰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 나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경험하는 카코포니(귀에 거슬리는 음향)와 불협화음, 단일화의 불가능성, 혼돈과 분열, 그리고 새로운 형태로 재배치되는 일련의 과정을 충실히 그려 내고자 했다. 나는 경계의 주변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흐릿하고 모호한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이 책에서 나는 고유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_608p
이 책을 한 마디로 ‘여행기’라고 한 옮긴이의 말이나 원제목의 뜻과 번역한 제목 그리고 알듯말듯한 작가의 집필 의도 등을 종합해 봤을 때 대략 어떤 작품이겠구나 짐작은 가능하고 그리고 일독 한 후 그래서 이렇게 씌어졌나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돌이켜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소설 속에는 공항과 같은 공간이든 비행기나 크루즈선 또는 지하철 등등 여행과 이동에 관한 많은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게 충분히 짐작이 가는데 거기서 한발짝 더 나갔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게 내 생각이고 그것이 부족하다는 게 이 리뷰의 요지랄 수 있다. 노벨상을 받았든 폴란드 최고의 상을 받았든 어쨌든 간에 말이다.
120개의 소제목 가운데 지금 기억나거나 기억하고 싶은 것은 서너 개의 이야기 정도다. 만약 누군가 내게 600페이지 전부는 못읽겠으니 몇 개만 추려달라고 하면 꼽을수도 있겠다. 작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그 몇 개만 읽고 그 느낌을 가진다면 이 책을 읽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책 제목과 동일한 <방랑자들>과 <날뛰는 여인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는 같은 이야기의 연속선 상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이야기를 몇 개의 소제목으로 나누어 놓거나 책의 앞 뒤에 따로 떨어뜨려 놓기도 했다.
길이와 상관없이 인상적이었던 꼭지들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르쿠츠크-모스크바>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신의 구역>
<여행 안내서> <여행 심리학 짧은 강연1> <적절한 시간과 장소>
<재의 수요일 축일> <지도 지우기><순례자의 성향> <여행에 대한 이야기>
2-3 표지와 제목에 대하여
깃털처럼 가볍게 떠도는, 그런 걸 상징하고 싶은 북커버 디자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해외 표지는 어떤가 싶어 찾아보니 다소 충격적이거나 좀 뜬금없다 싶은 표지였다
아무리 인체 해부에 관한 내용이 다른 이야기에 비해 상당 부분 비중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작품의 첫인상이 될 표지에 전면 배치하는게 적절한가 하는 것과 시각적으로도 호감이 가는 디자인은 아닌 것 같아 그나마 한국 표지가 낫지 않나 싶었다. 지도를 표지에 사용한 표지도 나빠보이지는 않지만 제목과 맞물려 상투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만약 당신이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라면 책을 덮고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이
제목 ‘방랑자들’과 그럭저럭 아귀가 맞는다고 할 만한가?
‘방랑’과 ‘여행’이라는 단어에 대한 느낌이나 뜻은 결코 하나로 묶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방랑 :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여행 :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굳이 사전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목적적인가 아닌가 또는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는가 등등을 따져본다면 과연 ‘방랑자들’이라는 제목이 적합한지는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방랑과 여행을 동류항으로 묶을 수 없다고 앞에서 말한 나는 제목 ‘방랑자들’의 방랑과는 다르게 ‘여행기’라고 정의한 옮긴이의 말에도 수긍할 수 없었다. 뭔가 따로 논다는 그런 말이다.
3 그럼에도
지금까지 전반적으로 아쉽다면 아쉬운 점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지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홍어찜을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이 홍어찜 먹방에 초대받아 먹방을 하게 된 그런 경우랄 수 있다.
누군가에겐 내가 꼽은 단점들이 장점으로 읽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기 시작해도 소설 읽기가 가능하다는 점도 장점일 수 있으며 나름의 쇼킹한 반전과 같은 이야기 역시 숨어 있다. 그리고 작가가 들려주는 역사적 사실이나 의학적 지식을 읽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특히나 거의 처음 국내에 소개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낯선 작가의 작품은 더욱 반길만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발간 예정작으로 잡혀 있는 <<낮의 집, 밤의 집>>과 같은 작품도 궁금하다.
독서란 것도 결국은 취향의 영역이라 보면 절대적으로 재밌거나 재미없는 건 없다.
어설픈 독자의 이러한 삼류 리뷰에 판단을 흐리지 말고 일단 훑어보기라도 한 후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홍어도 싫고 멍게 해삼도 안먹는 입맛을 가졌을 뿐이다.
192 몸집 -> 몸짓
303 왼쪽의태아는 -> 왼쪽의 태아는
369 에스컬레이터이나 -> 에스컬레이터나
453 좀 붙어 줘 -> 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