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민정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출판사 <난다>의 대표이면서 문학동네 시집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왜 출판사 대표가 다른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는지 이해불가라고도 했지만 출판사 대표와 시인으로써의 김민정이라는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속 좁은 오류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껏 네 권의 시집이 나왔고 나는 그 가운데 세 권의 시집을 보았다. 특별히 애정하거나 관심을 가진 시인은 아니지만 첫 시집부터 보여주던 특유의 걸죽한 입담을 시로 옮겨놓았다는 것이 오래 기억하는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물론 sns상에서 보여지는 소식도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아는 시라는 것의 두루뭉술한 이미지나 흔히 생각하는 시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단박에 박살내 버리는 게 김민정 시인의 시이니만큼 그렇게 직진 일변도의 시가 궁금한 독자라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번 네 번째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에는 재미있는 시들이 많았다. 이 재미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선 왈가왈부할 수 있겠다. ‘곡두’라는 부제에 번호가 매겨진 시가 44편 실려 있다.
지난 11월 16일부터 18일까지 신내림을 받듯 시들이 쏟아져 내렸고 그걸 받아 적었다는 신문 인터뷰 기사가 있다. 그래서인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장들의 행렬이 유난히 많이 읽힌 시집이 아닌가 싶었다.
특히나 제목의 ‘거기’와 ‘여기’, ‘나’와 ‘너’는 저승과 이승, 그리고 산자와 죽은자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만큼 유명을 달리한 가까운 문인들에 대한 시가 많은 것도 특징이랄 수 있겠다.
그 한 예로, 고인이 된 허수경 시인을 떠올릴 수 있는 ‘수경의 점 점 점’이란 시의 일부를 옮겨와 본다.
마침표라는 땅, 쉼표라는 하늘, 그 사이에 온전치 못한 우리니까 해보다 아니면 말든가 만나보고 아니면 헤어지든가 할 수 있는 능동의 자유로움이, 그 천진이 우릴 시인이게 하는 걸 거라고 맘껏 찍게 했던 점 점 점 여섯 개
‘수경의 점 점 점’ 일부
김민정의 시에는 시인의 일상이 곧잘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가 많은 편이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 시인들이나 작가들이 선배, 동생, 친구들로 소설 속 인물들처럼 등장하며 시인과 혈연 관계에 놓인 인물들도 곧잘 등장한다.
이쯤에서 첫 시집에 실린 첫 번째 시를 소개해 본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기림
계란이 터졌는데 안 닦이는 창문 속에 네가 서 있어
언제까지나 거기, 뒤집어쓴 팬티의 녹물로 흐느끼는
내 천사
은총의 고문으로 얼룩진 겹겹의 거울 속 빌어먹을 나야
다음으로는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시 한 편을 더 소개해 본다
젖이라는 이름의 좆
네게 좆이 있다면
내겐 젖이 있다
그러니 과시하지 마라
유치하다면
시작은 다 너로부터 비롯함일지니
어쨌거나 우리 쥐면 한 손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빨면 한 입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썰면 한 접시라는 공통점
(아, 난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이 지극한 공평, 이 아찔한 안도)
섹스를 나눈 뒤
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
저마다의 심장을 향해 도넛처럼,
완전 도-우-넛처럼 잔뜩 오그라들 때
거기 침대 위에 큼지막하게 던져진
두 짝의 가슴이,
두 쪽의 불알이.
어머 착해
이 시는 이번 네 번째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도 언급되는데 그 부분을 소개해 본다
...제각각 쳐진 하나의 커튼 너머로 앞을 보고 누워 있을 남자와 뒤를 보고 누워 있는 나를 젓가락 두 짝처럼 여기자니 「젖이라는 이름의 좆」 2탄 쓸 것도 아니고 필요한 게 마스크가 아니라 모자구나...
‘모자란 모자라
마침표는 끝내 찍지 아니할 수 있었다’
-곡두 44 _부분
앞뒤 맥락 없이 읽자면 무슨 소린지 모를 것이란 걸 알지만 꽤나 오래전에 썼던 시를 다시 언급한다는 건 그만큼 시인에게도 각별한 시인가 싶었다. 아무래도 좀 발칙한 시이기도 해서 많이 옮겨졌지 않을까 짐작도 해본다. 누군가는 이게 왜 시냐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는데 조금만 찾아보면 시인 이유를 나름 설명해놓은 글들을 찾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가와 작가의 글도 함께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면에서 시인들의 시집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시에도 나이듦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당연할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집은 좀 잘 읽힌다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번 시집의 첫 시를 소개 한다.
1월 1일 일요일
-곡두 1
낮에는 도끼와 톱을 봤고
밤에는 꿩과 토끼를 봤다.
시에다 씨발을 쓰지 않을 것이고
눈에다 졸라를 쓰지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눈 내렸다.
‘머리’로 가 붙을 수 있는 대목은 다
덮이었다.
더도 덮일 것이었다.
쑥차 마시면서
쑥대머리 들었다.
과연 시인의 다짐대로 쓰지 않겠다고 한 말을 안썼을까 궁금하다면 시집을 찬찬히 읽어봐야 할 것이다
시집을 읽기 전이든 후든 박준 시인이 쓴 발문의 일부를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발문의 일부다.
저도 시인의 시가 어떤 경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경계를 살펴보는 것은 어쩌면 무용합니다. 무용하지만 무용한 것을 알고 있다는 믿음으로 더 말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먼저 시인이 만들어낸 경계는 그간 우리가 시라고 합의한 것과 이제껏 합의되지 않은 것의 사이에 있습니다. 동시에 시인과 화자가 만들어내는 거리에 대한 각각의 경계입니다.
박준 시인은 시인 이장욱이 쓴 첫 시집의 해설 가운데 ‘경계’에 대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이 시집의 지지자이지만, 나의 지지를 넘어선 곳에서조차, 이 시집은 여전히 ‘경계’에 걸려 아슬하다.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해설 시인 이장욱
당신이 이 시집을 읽어볼지 안볼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읽어본다면 앞에서 언급된 ‘시라는 것의 합의’라는 게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4편의 시를 읽어가다보면 이게 뭐지 싶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시도 분명 있다. 한편으로는 아닌척 하면서 능글맞게 요즘 말로 뼈 때리는 말을 하는 시도 있다. 누군가는 하얗게 빛나는 백골과도 같은 게 시여야 한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뼈에 붙은 부들부들한 살점을 뜯는 맛에 시를 읽는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만 비만에 가깝거나 골다공증에 걸려 쉽게 부러지는 뼈와 같은 시는 걸러져야 하고 그런 안목은 많은 시를 읽어보는데서 갖추어질 것이다.
시집이 나온걸 핑개삼아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해보았다.
이번 시집에서 딱 한 편을 골라 읽어본다면 서슴없이 다음의 시를 택하겠다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라고 하는 반복이 가져다주는 리듬감과 마냥 시소 위에 앉아 있게 하는 정황들의 이끌림이 마음에 들었다
일부만 낭독해 본다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곡두 35
엉덩이가 시려 보니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반팔 티셔츠에 팬티 바람으로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정글짐도 있고 그네도 있고 철봉도 있고 미끄럼틀도
있는데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건너편에 누가 없으니 세월아 네월아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건너편에 누가 정말 없는 걸까 노려보다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누가 불러 나왔나 내가 홀려 나왔지 혼자니까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발에 묻은 모래 털기 귀찮으니까 모래 속에 발을 더 파묻어가며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어느 밤 그랬으니까 다신 그런 밤 없기를 하였는데 또
까먹고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