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시 오지 않는 것들 - 최영미 시집 ㅣ 이미 1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19년 6월
평점 :
지리멸렬한 고통
내게 칼을 겨눈 그들은
내 영혼의 한 터럭도 건드리지 못했어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리멸렬한 고통이 제일 참기 힘들지
최영미 시인의 신작 시집이 나왔다
『이미 뜨거운 것들』 (실천문학사 2013년 3월) 이후 6년 만이다.
이번 시집은 지금까지의 시집과는 제작과정의 결이 좀 다르다.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겠지만 출판사 이름이 참 낯설다. 한국의 문학 시집들이 출간되는 출판사는 몇몇 군데로 한정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어떤 출판사의 이름도 달고 있지 않다.
시인이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출간 문의를 해보았으나 그 어떤 곳에서도
수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에 시인이 직접 출판사를 등록하여
독립출판 개념으로 시집을 출간했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현재 최영미 시인은 어떤
시인과 법정 다툼에 있다. 그 시인과의 다툼 때문에 기존 출판사들이
출간을 꺼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건 합리적인 의심이라 할 것이다.
이 의심이 사실이라면 진짜 좀 빡친다. 그래서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더 크기만 하다. 다다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시집은 더 특별하다고 할 수 있고 더 많은 독자들이
이 시집을 주목해야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울러 최영미 시인이 꼭
승소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최영미 시인하면 자동적으로 『서른, 잔치는 끝났다』 라는 시집이 떠오를
것이다. 나 또한 그 시집으로 최영미 시인을 처음 읽었다. 그리고
『돼지들에게』란 시집을 통해 신랄한 시들을 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최영미 시인의 시집을 찾아 읽게 된 건 우연히
듣게 된 한 편의 시에 꽂혔기 때문이다. 우선 그 시부터 소개해 본다.
내버려둬
시인을 그냥 내버려둬
혼자 울게 내버려둬
가난이 지겹다 투덜거려도
달을 쳐다보며 낭만이나 먹고살게 내버려둬
무슨무슨 보험에 들라고 귀찮게 하지 말고
건강검진 왜 안 하냐고 잔소리하지 말고
누구누구에게 잘 보이라고 훈계일랑 말고
저 혼자 잘난 맛에 까칠해지게 내버려둬
사교의 테이블에 앉혀 억지로 박수치게 하지 말고
편리한 앱을 깔아주겠다,
대출이자가 싸니 어서 집 사라,
헛되이 부추기지 말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게 내버려둬
헤매다 길가에 고꾸라지게
제발 그냥 내버려둬
특히나
달을 쳐다보며 낭만이나 먹고살게 내버려둬
저 혼자 잘난 맛에 까칠해지게 내버려둬
집 없이 떠돌아다니게 내버려둬
헤매다 길가에 고꾸라지게
제발 그냥 내버려둬
같은 문장들이 시인이라는 이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것 같아 좋았다.
시인이란 그런 사람들 같다 결국엔 길가에 고꾸러질걸 뻔히 알면서도
시를 짓겠다는 사람들. 미쳐야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최영미 시인은
생활고에 쫓겨 기초 수급자가 되기도 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번 시집에는 어머니를 간호하며 쓴 시 「수건을 접으며」를 비롯,
1993년 발표한 '등단소감'이라는 시도 실려 있다. 물론 싸움의 중심에
서게 만든 ‘괴물’ 이라는 시도 수록 되어 있다.
최영미의 시는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 마시는 위스키 같다. 뭔가가
한 방에 후욱 하고 치고 들어온다. 이번 시집의 많은 시들이 그렇다.
애둘러 말하지 않는다. 쏘맥처럼 아무렇게나 말아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는 흐리멍텅한 시가 아니다.
내가 그의 삶을 알면 얼마나 알까마는 그의 삶도 스트레이트 하지
않을까 싶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 싶은 삶 말이다. 이 바람에
이렇게 저 바람에 저렇게 휘어져야 사는게 편하다고, 편한대로 사는게
장땡 아니냐고 우리는 아니 나는 전전긍긍하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굽히지
않는 시퍼런 시는 우리 아니 나를 불편하게 한다. 가난은 불편한 것이지
죄악은 아니란 말이 있지만 언젠가부터 가난은 죄가 되어 우리 앞에 돌아
왔다. 가난한 시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 뭔가가 차올라 이내
묵지근하고 뜨거워진다. 결코 가난할 수 없다.
밥을 지으며
밥물은 대강 부어요
쌀 위에 국자가 잠길락말락
물을 붓고 버튼을 눌러요
전기밥솥의 눈금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밥물은 대충 부어요. 되든 질든
되는대로
대강, 대충 살아왔어요
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쟁만큼 힘들었어요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왜 그래야지요?)
서른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이라는 시집의 제목을 보며
나는 다시 올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다시 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서글픈 상념에 빠졌다
다시 올 수 있는 게 단 하나라도 있을까.
단 한 순간도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았다. 시간은 모든걸 휩쓸고 갔다.
그 가운데 어떤 하나가 시간을 거슬러 다시 올 수 있을까
단 하나도 없다
그 답밖에 없다.
다시 오지 않는 순간에 대한 시인의 말을 읽어보며 영상을 마친다.
시인의 말
내 생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며,
정신이 사나워져 시를 잊고 살았다. 길을 가다 번뜩 떠올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주 멋진 구절이었는데, 나중에 아까워했지만…… 가슴을 두드렸던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 되살릴 길 없는 시간들을 되살리려는 노력에서 문자 예술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어느 봄날, 봉긋 올라온 목련송이를 보며 추억이 피어나고 노래가 나를 찾아왔다.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 동안은 시를 영영 잃지 않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