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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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잡담을 좀 한다.


루시아 벌린을 비롯 많은 예술가들이 생존하는 당대에는 지독하게 무명이다보니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처참한 생활을 하다 아무도 모르게 생을 마감 한다. 그렇게 죽어간 예술가들 가운데 일부는 사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로 재평가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고흐나 카프카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고흐는 살아생전에 단 한 점의 작품을 팔았다고 하며(동영상 맨트가 틀렸습니다), 카프카 역시 유언을 지켜주지 않은 친구 덕분에 오늘날의 카프카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에게 고흐나 카프카가 없다한들 바뀔 건 하나도 없다. 그들을 알았기에 그들이 없었다면 이라는 가정이 성립할 뿐이다. 사후에 유명해지지 않아도 좋으니 더 많은 예술가들이 살아서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 받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 당사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궁금하다. 당대에 인정 받다가 사후에 잊혀지는 것과 당대의 무명을 보상받듯 사후에야 비로소 인정 받고 오래 기억되는 것, 과연 예술가들은 어느 쪽을 택할까. 예술의 예자도 모르지만 나는 당대에 영광을 누리고 자연스레 잊혀지는 쪽을 택하겠다. 나 없는 세상에서 내 작품으로 인정 받아 내 작품이 수억원 하면 뭐하고 전세계인들의 필독서가 되는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 말이다.


최근 이야기 한 리스펙토르나 오늘 이야기 할 루시아 벌린이나 사후에 인정 받았다는 공통점 때문에 한번 이야기해 봤다.



우선 도대체 이름도 생소한 루시아 벌린이란 작가가 누구냐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루시아 벌린 Lucia Berlin 1936~2004


알래스카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여러 광산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돌아온 후 칠레의 산티아고로 이주한다. 10살에 척추옆굽음증 진단을 받았고 평생 고통스러운 상태가 따라다녔다.


3번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했으며 네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해야 했다. 평생 76편의 단편을 발표했다.『향수』(1991) 『안녕』(1993) 『내가 지금 사는 곳』(1999) 과 같은 단편집을 발간했다. 2004년 태어난 날인 11월 12일 사망했다.


지금쯤 이 작가가 또는 이 책은 어떤가 싶어 온라인 서점을 검색해보고 있을 시청자도 있을 것이다. 소설가 김연수의 띠지 카피가 눈에 띈다.


“그동안 루시아 벌린을 몰랐다고 해도 괜찮다.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카피긴 하다. 해외 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일단 번역 된다는게 어디냐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 원서로 먼저 읽은 어떤 독자는 혼자만 알고 싶은 작가라고 후기를 남겨 놓기도 했다. 그럴 때 원서를 읽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할 때 김연수의 말처럼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말이다.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 쏟아진 찬사는 실로 휘황찬란하다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런 찬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 이제야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는 모든 매체들이 좀 꼴사나운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그동안 눈 감고 있다가 작가 사후 11년이나 지나서야 온갖 미사어구를 갖다붙이는 건 스스로 책을 알아보는 안목의 어두움을 드러내는건 아닌가 그 말이다.



막연한 느낌이지만 평생 쓴 76편 가운데 43편이 소개 된 만큼 나머지 작품들이 소개될 것 같진 않다. 그렇다고 했을 때 아마 이 책은 입소문을 거치고 거쳐 절판된 후 다시 발간 되기도 한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과 같은 책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좋은 작품집이란 얘기다.



43편 모두를 이야기할 수는 없고 표제작 청소부 매뉴얼 중심으로 작가와 작품에 대해 살펴본다.


원제는 자살 유언 쓰기 매뉴얼 인데 바꾼 제목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작가들 자신이 지은 제목보다 출판사에서 지어주는 제목이 대부분의 경우 더 나은 경우를 많이 본다.


제목 그대로 각 가정으로 방문해 청소부 일을 하고 한편으론 수면제를 모으며 보고 느낀 점들과 그 과정에서 얻게 된 노하우 그러니까 청소부 매뉴얼이 소설의 주요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틈새에 살짝살짝 주인공의 이야기를 한두 문장씩 넣은 게 소설을 더욱 빛나게 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수면에 선명하게 반사되는 풍경이 청소부 이야기 이고 수면 밑으로 희미하게 보일 듯 말듯한 물의 흐름이 한 문장씩 툭툭 들어가 있는 자신만의 이야기다. 그것을 캐치하여 연결해보는 것도 재밌었다.


그 문장들을 모아봤다



내가 실제로 훔치는 건 수면제뿐이다. 47p

술 취한 인디언이 이제는 내 얼굴을 익히고 항상 이렇게 말한다.

“그대여, 인생이란 그런 거라오.” 52p

이들의 집에서 일하며 모은 수면제가 이제 서른 알이다. 52p

나는 수면제를 모은다. 57p

테리, 사실 나는 전혀 죽고 싶지 않아. 64p

나는 마침내 울고 만다. 64p


어쩌면 이 문장들을 쓰기 위해 청소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했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나의 억측일 것이다. 물론 이 문장들 외에 살을 붙인 몇몇 문장들은 시청자들을 위해 꺼내지 않고 남겨둔다. 여러 청소부 이야기들과 이 문장들이 전혀 이질적이지 않게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와 있다.


소설가 마다 저마다의 전략과 전술이 있을 것이고 각자 특기와 장기가 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작가라면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루시아 벌린의 전략이랄까 특기는 이런데 있지 않나 싶다.


직접 말하기 방식의 소설이 아닌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양적으로는 단편의 분량 속에서 여러 장면 장면으로 조합된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가 읽은 다음에 떠오르게 하는 루시아 벌린 이라는 작가를 접할 수 있어 아주 흡족한 독서가 되었다.


소설의 디테일은 경험과 취재에서 올 수 있을텐데 루시아 벌린의 소설은 다분히 저자의 경험에서 왔을 것이다. 이를테면 술주정뱅이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단편 ‘모이니핸 치과’에서 살짝 드러나는 것처럼 경험 아니면 쓸 수 없는 디테일들이 있다. 그런 면에서 단편 ‘청소부 매뉴얼’의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경험담일지 한번쯤 상상해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또다른 포인트 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그 모습들을 전부 알아챌 수는 없을 것이다.


벌린이 사망한 후 네 아들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단편들은 실화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자전적이라는 건 아니지만 대충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역자 후기에서 옮긴이는 루시아 벌린과 레이먼드 카버의 작가적 성패를 언급하고 있다. 카버는 당대에 성공한 작가가 되었지만 벌린은 사후 11년이 지난 2015년에서야 베스트셀러 작가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역자는 카버와 비교를 하며 벌린이 당대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성향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진단을 한다. 생전에 벌린은 “자신은 안정된 삶에 저항했다.”라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벌린은 일찍이 예술기금에서 지급하는 지원금을 받았지만 그 돈을 여행하는데 모두 써버렸고 그후로는 어떤 지원금이나 보조금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기질의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성격을 주체하지 못해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예감을 불안하게 외면하며 막다른 곳으로 돌진하는 사람들. 불운한 천재들의 특징이다.


루시아 벌린이라는 생소하지만 아주 인상적인 작가가 이제 막 국내에 소개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벌써 더 이상 씌어지지 않았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소설들에 휩쓸려 루시아 벌린이라는 이름을 놓치는 일은 당신이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좀 많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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