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짐승아시아하기 문지 에크리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정하는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새로운 산문 시리즈를 출간했다.

 

이름하여 <문지 에크리>

에크리란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시리즈는 작가에게 최대한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을 허용하는 데서 시작하고 있다.

작가는 어떤 대상이나 주제와 상관없이 애정하는 관심사에 대해 쓴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글은 장르적 경계를 넘는다. 작품을 통해 만나는 작가의 모습에선 볼 수 없었던 좀 더 개인적인 내밀한 영역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1차분 4권이 출간되었다.

작고한 고 김현 평론가, 시인 김혜순과 김소연 그리고 문학평론가 이광호가 그 주인공들이다.

책 뒷날개에는 출간 예정인 저자들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면면이 기대할만 하다. 예를들면 내가 기대하는 저자를 꼽아보자면, 이제니, 이장욱, 정영문, 진은영, 한유주 등이다.




특히나 평론가 이광호는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를 대상으로 한 글을 썼는데 많은 애묘인들이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책의 크기나 만듦새도 다 마음에 드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문지 에크리 라는 하나의 시리즈 안에 들어가는 책들의 디자인 치고는 좀 쌩뚱맞은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특히나 김혜순 시인의 책만 검은색 바탕에 표지 그림도 공통적인 느낌이 없다. 저자의 요청에 의해 특정 화가의 그림을 쓴 것 같은데 아쉽다. 뭐 책덕후들이 흔히 하는 책품평을 조금 해봤다.

 

1차분 네 권 가운데 나는 당연하게도 애정하는 김혜순 시인의 책을 골랐다.

이 산문을 통해 시인 김혜순이 시를 쓸 때 느끼는 바나 자신의 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을 읽을수 있어 김혜순의 시를 좀 더 가깝게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읽어봐야할 책이라

그 이유는 책머리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어서 한번 옮겨와 봤다.

 

 

ㅡ책머리에

 

나는 시를 써오는 동안 왜 그토록 많은 쥐, 돼지, , 곰 등등과 유령, 여자로서 시 안에 기거했던가?

나는 그것에 대해 쓰지 않고, 그것을 '한다'고 생각했던가?

나는 왜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죽은 자, 사라진 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가?

나는 산문을 쓰면서는 왜 그토록 자주 바리공주를 호명했던가?

나는 바리공주가 아버지의 나라를 반쪽 떼어 주겠다는 제의도 거절한 채,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죽은 자를 건네주는 영구적인 직업으로 뱃사공을 선택한 것처럼, 나 스스로의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_부분

 

김혜순 시인의 시를 오래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시 안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동물 하나를 꼽으라고 할 때 쥐라고 한다면 대개가 수긍하리라 본다. 그리고 바리데기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한 저자인만큼 김혜순과 바리데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 라는 제목을 이루는 각각의 낱말을 하나씩 떼어낸 다음 그 의미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여자로써 짐승으로써 아시아에서 여러 주체가 되어 하게되는 하기 로써의 글쓰기인 것이다.

 

최근 출간된 저자의 시집 날개 환상통에서 평론가 이광호는 -하기를 통해 김혜순 시를 언급했다. 이처럼 무엇무엇 하기 라는 것은 시인 김혜순이 붙잡고 있는 시적인 화두가 아닐까 싶은데 이 책을 통해 살짝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책은 티벳, 인도, 실크로드를 잇는 지리적 환경에서 씌어지는데 그 가운데 특히나 붉음으로 대표되는 실크로드의 출발과 몽골까지 이어지는 여정에서의 글들이 나는 좋았다 그 가운데 한 편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붉은 책

 

이것은 해가 지지 않는 책.

내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 책을 읽어가면 영원히 황혼이 계속되는 책.

이 책은 사막의 영혼, 모래의 날개.

 

당신이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미칠 지경이다.

당신이란 붉은 책은 한번 펼쳐지면 다시 닫을 수가 없다.

아마 지옥이 그럴 거다, 지옥이란 다시 돌이킬 수가 없는 곳.

당신을 접으려 하면 당신은 읽어라 읽어라 읽어라 펼쳐질 줄밖에 모른다.

당신은 한번 빠지면 실종되려야 실종될 수가 없는 열탕 지옥이다.

이 사막에선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혹은 모래 알갱이 전부가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_부분



앞서 올린 여행생활자 영상에서 이야기 했듯이 나는 사막에 대한 불온한 상상이랄까 로망을 품고 있는데 붉음 으로 묶여진, 심지어 붉은 종이 위에 씌어진 사막과 모래, 태양, 사라진 국가 등 결국 가지 못할 붉은 사막에 대한 문장이 주는 막연한 만족이 주는 체념을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책머리를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산문이지만 산문의 모래언덕에 발이 빠져가며 오르다보면 저자의 시세계를 마치 신기루처럼 만나지 않을까 싶은 설레임 가득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