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과 닭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소설집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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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보다 뛰어난 브라질 소설가

소설가 배수아가 반해서 번역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그의 단편 소설집 달걀과 닭

배수아 작가가 리스펙토르에 빠지게 된 이야기



소설가 배수아가 반한 소설가

 

이 작품집을 안읽기로 했다가 읽기로 한 이유가 있다

안읽어야지 했던 이유는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된 저자의 작품 나에 관한 너의 이야기라는 걸 몇 년 전 구해 읽고 아 이 작가는 내 꽈가 아니구나 싶어 밀쳐 놓았었다.

그랬는데 이건 왜 읽었냐 하면

이 책을 먼저 읽고 있던 어느 분의 소개글과 본문 가운데서 따온 문장들에 대한 감상의 영향이 지대했다. 앞에서 읽었던 그 작품과는 뭔가 궤가 다른 작품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번역자가 배수아 작가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긴 했다.

배수아 작가는 자신의 소설 북쪽 거실의 표지 그림을 리스펙토르의 해외 판 표지 화가 그림으로 할 정도로 리스펙토르의 작품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짐작 된다. 그 사실은 옮긴이의 글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아울러 옮긴이의 말을 읽어나가보자니 좀 더 집중해서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리스펙토르는 외교관과 결혼했지만 외교관의 아내라는 틀에 박힌 삶을 벗어나

작가로 살기 위해 남편을 떠났다. 두 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현재 브라질에서 여성 카프카라는 타이틀을 달고 현대 브라질 문학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으나 그녀가 남편과 이혼 후 귀국했을 당시 대다수 출판사들은

그녀의 작품을 외면했다. 남미문학하면 쉽게 보르헤스를 떠올릴 것이다.

클라리시의 작품을 읽고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에 소개한 엘리자베스 비숍은 이렇게 말했다.


보르헤스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녀처럼 탁월하게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번역한 배수아 작가의 리스펙토르 작품에 대한 간략한 평이다


예측할 수 없는 부조리와 돌연함으로 가득한 그녀의 글은

구조나 플롯으로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받은 느낌은,

전체 이야기가 하나의 덩어리로, 한꺼번에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녀가 오랫동안 이해받지 못하는 작가, 오해받는 작가였던 것은 이상하지 않다.

클라리시가 죽기 직전에 발표된 마지막 소설 별의 시간에는,


이글은 (독자들이) 읽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작가에 의해) 쓰이고 있다는 진술이 나온다.

내게는 그 말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글쓰기의 핵심처럼 들렸다.


단 몇 줄의 설명으로 감이 올지 모르겠으나 어떤 독자는 어렴풋이 짐작할지도 모르겠다아 이 작가는 내 꽈구나, 또는 내 꽈가 아니구나 하는.


이 단편집에는 26편의 단편들이 실려있다. 옮긴이의 말을 보자면 '달걀과 닭'이 대표 단편으로 작가 역시 인정한 모양이다. 리스펙토르 생애 단 한 번 있었고 사후에 공개된 인터뷰에서 그는 표제작 달걀과 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작품 중에서 나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그게 달걀과 닭이다


대부분의 독자는 이 말을 듣고 금방 떠오른 생각이 있을 것이다.

작가 본인이 써놓고 작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무슨 궤변이냐 그러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대표작일 수가 있느냐 할 것이다.


옮긴이 배수아는

'달걀과 닭'은 희게 번득이는 빛의 칼날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칼날에 베이는 것을 사랑한다. 라고 했다.


'달걀과 닭'의 일부를 옮겨와 본다


그러면 닭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달걀은 닭의 위대한 희생이다.

달걀은 닭이 일생 동안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이다. 달걀은 닭이 영원히 닿지 못할 꿈이다. 닭은 달걀을 사랑한다. 그러나 달걀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 자신 안에 달걀이 있음을 안다면, 닭은 스스로 조심하게 될까? 자신 안에 달걀이 있음을 안다면, 닭은 닭으로서의 상태를 상실해버린다. 닭으로 존재함은 생존을 의미한다. 생존은 구원이다. 왜냐하면 삶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에. 삶은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기에. 그러므로 닭이 할 일이란, 오직 계속해서 생존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생존이란, 죽음으로 이르는 삶에 대항하여 투쟁을 유지하는 것이다. 닭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바로 그것이다. 닭은 우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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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 역시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기에 실린 26편의 단편들이 모두 '달걀과 닭'과 같을까? 감히 말하자면 나는 표제작인 '달걀과 닭' 이 한 편을 예외작으로 놓고 싶다. 이 한편 때문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라는 작가를 리스트에서 지워버리는 건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를 모두 읽고 남겨 두던가 아니면 대~충 읽어도 괜찮다고 본다.


귀 너머에는 소리가 있다.

시각의 먼 끝에는 풍경이 있으며, 손가락의 끝에는 사물이 있다-그곳으로 나는 간다.


나의 머나먼 끝에 내가 있다.

, 애원하는, 궁핍을 겪는 나, 매달리고, 통곡하고, 한탄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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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시적인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그곳으로 나는 간다 와 같은 작품은 단 두 페이지에 불과 하다. 이처럼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한 작품이지만 충분히 읽어볼 만한 작품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표제작에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우화스럽기도 한 이라는 작품에서도 리스펙토르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고 본다.



작품 외적인 이야기로 좀 빠져서, 배수아 작가가 어떻게 리스펙토르에 빠지게 되었나 하는 장면을 요약해서 옮겨와 본다.


브라질 상파울루 공항에 도착했을 때, 검은 표지의 책 한 권이 내게 건네졌다.

G.H.에 따른 수난

열 페이지 정도를 읽을 때까지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얼마나 기이한 제목인가, 하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얼마나 기이한 문장들인가. 얼마나 기이한, 이야기 없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얼마나 기... 목소리인가. 그리고 고백하자면, 열 페이지 정도를 넘길 때까지는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할지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할지 머뭇거리는 상태였다.

지금 G.H.에 따른 수난은 내 의식에 가장 깊게 달라붙은 책 중의 하나로 내게 어둡고도 둔중한 충격이었다.

지금 G.H.에 따른 수난, 카프카 이래로 가장 신비한 작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리스펙토르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포르투갈어 교사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자신은 G.H.에 따른 수난을 네 번이나 읽었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 날, 열일곱 살 난 소녀가 왔다. 소녀는 G.H.에 따른 수난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배수아 작가의 팬이 아니라도 이렇게 설명되어지는 작품이라면 한번쯤 호기심의 감각이 반짝하지 않나? 하지만 나 역시 힘주어 말해지고 있는 기이하다는 표현에 한편으론 달걀과 닭을 떠올리며 안읽을게 뻔하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은 책을 들춰보면 확인되는 일이다. 가까운 시일 안에 번역 출간 된다니 한번 기다려 확인해 볼만한 일이다. 어쨌든 참 궁금하기는 하다.

제발트 번역을 통해 국내에 제발디언 바람을 일으켰던 배수아 작가가 이번에는 리스펙토르 바람을 불러일으킬지 흥미롭다.


참고로 리스펙토르 생애에 단 한번 19772, 상파울루 TV 와의 텔레비전 인터뷰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어서 주소를 올려 놓았다. 이 인터뷰는 작가의 부탁대로 사후에 공개 되었다.


https://youtu.be/ohHP1l2EVnU

 

리스펙토르는 자신의 글에 대해


내가 글을 쓰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종류든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라고 했다.

저자의 말과 같이 리스펙토르를 당신이 읽는다면 일반적인 독서를 통해 얻게 되는 만족감 같은 건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론 독서를 통해 불만족 하고 불편한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작품을 만나는 경험이 오히려 더 즐겁지 아니한가 한다면 이상한 놈이 되려나.


여하튼 뭔가 이야길 하긴 한 것 같은데 딱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낯설기만 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라는 작가의 소개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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