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테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들어가기 전에

 

오늘 소개하고 살펴볼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 번역된 것은

1992년으로 보인다. 그때 번역된 한 권 이후 다시 번역,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문학과지성사에 의해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지금까지 대략 14권의 작품이 출간되었는데 국내에 소개된 기간과 작품 수에 비하면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무래도 일반적 소설의 형식이랄수 있는 서사 위주의 소설이라기 보다 시적인 문장과 관념적 내용으로 일부의 열혈독자층만이 읽는 작가로 매김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모든 작품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키냐르 작품을 대부분 출간해온 문학과지성사 편집부에 따르면 국내 파스칼 키냐르의 독자층은 대략 2000명 정도라고 번역가 송의경은 이야기 한다.

 

번역가 송의경은 키냐르 전문 번역가라 할 수 있는데 14권 가운데 11권을 번역했다. 송의경이 말하는 키냐르 작품의 특징은 이따금 탄성을 지를 만큼 아름다운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때론 작품이 미로와 같아서 길을 헤매기도 하는데 그래서 한 문장 한 문단

아무데나 펼쳐 읽어도 무방하다라는 말도 곁들인다.

씨앗에 꽃이나 나무가 들어가 있듯이 한 문장 한 문단에도 키냐르가 온전하게 들어가 있다는 비유를 했는데 적절한 것 같다.




일단 부테스는 어떤 인물이냐를 알아야 한다. 부테스는 음악 소리에 끌려 물에 뛰어든 자이다

키냐르는 그리스 신화에서 착상하여 음악과 물에 뛰어든다는 행위를 절묘하게 섞어 시를 읽는듯한 소설을 써냈는데 그게 키냐르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면이 독자들로 하여금 낯을 가리게 하는 걸 수도 있다.

본 영상에서는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보다 이 작품을 읽은 느낌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아무렇게나 떠들어 보겠다. 뭔가 아삼삼한? 읽을 꺼리를 찾는다면 파스칼 키냐르를 추천한다. 물론 모든 작품이 아삼삼한 건 아니다. 특히나 가장 최근 프란츠 출판사에서 출간된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라는 작품은 전통적 소설 방식이라고 하니 그 점 참고 하기 바란다.


먼저 본문의 일부를 읽어 본다.

 

그는 어디로 가는가? 이름들 자체보다 훨씬 더 절박한 음들이 들려오는 곳으로 간다.

 

부테스는 왜 물에 빠져 죽는가?

우리는 마른 데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음악의 본질을 성찰하는 제아미의 노에서 침묵의 고수인 노인도 물로 뛰어든다.

그 역시 자살한다. 그 역시 익사한다.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란 희미한 빛 속의 움직임에 불과했던 오래된 바다에 비한다면 낯선 육지와도 같은 것이다.

산다는 것은 오직 포만의 운명을 지녔을 뿐이다.

24p

 

본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물로 뛰어드는 욕망이다.29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 음악과 뛰어듦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음악에 꽂혔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부테스처럼 음악에 이끌려 어디론가

정신을 팔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는 경험을 한다. 풍덩 하고 음악에 빠져버린다는 이야기다.

그런 경험을 시적 소설로 형식화한 읽을 꺼리가 궁금하다면 키냐르 꽈인 것이고 무슨 뜬구름 잡는 멍멍이 소리냐 하면 키냐르는 읽지 마시라.

 

어떤 소설은 뭔가를 상상하게 하고 어떤 소설은 인정하게 만든다. 뭔가를 상상하게 만드는 소설은 옆사람에게 뭐라고 추천하기가 쑥스럽거나 어렵다. 왜냐면 뭔가 살짝 제정신이 아니거나 몽상이나 하는 모자란 놈으로 보일까 싶어서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라고 따지듯 물어오는 상대에겐 개뼉다귀 같은 구체적인 걸 던져줘야 물지 않는데 두루뭉술한 걸 보여주면 사정없이 물어버리거나 개무시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책추천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하는 것이다.

 

종종 해외 토픽 같은 뉴스를 통해 해안으로 올라와 죽는 고래들을 본다. 물에 뛰어드는 행위나 물 밖으로 뛰어드는 행위나 그 주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세계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므로 같은 행위이고 향하는 세계도 결국은 같은 곳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음악을 듣고 홀리듯 가고자 하는 세계는 고래로 치자면 물 밖이고 인간으로 치자면 물 속인 것이다. 귀소본능이랄까 우리가 잉태된 곳은 양수가 가득한 물속이었으니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건 당연할지 모르겠다.

 

음악을 듣고자 하는 것은 청각적 감각에 의탁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각보다 청각에 먼저 귀를 트고 청각이라는 감각은 사망 후에도 가장 오래 살아 있다고 한다.

 

키냐르의 글들을 읽다보면 어느순간 다른 세계로 몽상이나 망상에 빠진다. 내용과 상관없이 내 생각대로 침잠하다 문득 다시 현실의 본문으로 돌아온다. 그런 순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런 틈이 풍부한 글들을 찾아 이 책 저 책 찾아 헤매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뛰어들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눌 때, 뛰어들지 못한 자는 죽을 때 까지 뛰어드는 자와 뛰어 듦에 대한 미련과 연모에 괴로워 한다. 오직 뛰어들지 못한자들만이 무모함이라며 손가락질 하지만 그것은 뛰어들지 못하는 비루함에 대한 자기변명이다.

뛰어든다는 것은 취하는 것이다. 그것에 취해서 정신이 마비되어 빠져버리는 것, 그 순간 자신이 죽는다는 것 조차 감각하지 못하는 것.

키냐르는 자신이 집안 대대 이어온 음악가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생각을 평생 안고 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끊임 없이 그 주위를 배회하며 음악에 대한 글들을 썼을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아름다우며 동시에 "음악혐오"와 같은 작품을 써내게 했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나는 앞에서 상상하게 하는 소설이 있다고 했다. 키냐르의 어떤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소설과는 상관없는 상상에 빠진다.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의 여기가 아닌 저 어딘가로 몽유병 환자처럼 떠다닌다. 키냐르의 작품은 그렇게 부유하게 한다. 상상으로 뛰어들게 하고 빠지게 하여 부테스가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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