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라
김영하 / 문학동네 / 272쪽
(2017. 12. 13.)
한 친구는 어느 도시에 가든 청바지를 사입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의 집에는 세계 각국에서 산 청바지로 옷장이 그득합니다. 대부분은 리바이스나 게스 같은 대중적 브랜드의 블루진입니다. 나는 그것들을 서로 구별할 수 없지만 친구는 기가 막히게 가려 냅니다. 이것은 지난 겨울 런던에서 산 진이고, 이것은 베이징에 서 산 건데 어쩐지 가짜 같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고 “청바지를 사입고 나오면 이상하게 미음이 푸근해진디구." 그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여행자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의식을 치르는 것 같습니다. 그 친구처럼 청바지를 사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나처럼 서점에 들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 이곳에도 프란츠 카프카와 알베르 카뮈를 읽는 사람이 있고 연말이면 달력과 수첩을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위안이 됩니다.
(P.82)
어쩌면 인간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새의 울음소리를 완벽하게 흉내내는 폴리네시아의 원주민처럼, 자칼의 가면을 쓰고 행진하는 아마존의 어느 샤먼처럼, 인간은 어떤 순간 완벽하게 다른 존재 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정말 인간은 삶의 전 순간을 오직 인간으로만 사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개나 돼지, 새나 물고기인 그 어떤 순간, 그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때가 간혹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도들이 전생을 믿는 게 아닐 까요? 우리가 우리의 긴 윤회 과정 어디쯤에선가 왜가리나 멧돼지, 코끼리나 흰소있을 수 있다는 믿음은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일까요?
(P.87)
그녀는 황동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호텔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갑니다. 또각또각 삐거덕 또각. 나무계단의 소리가 정겹습니다. 나는 언제나 나무계단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그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는 단층집과 아파트에서만 살았습니다. 인간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며
조용히 신음소리를 내는 나무계단은 가져보질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호텔을 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엘리베이터도 없다니! 그녀는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게 더 미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나무가 되고 싶고 나무의 생을 마친 후에는 계단이 되고 싶습니다.
(P.91)
광화문 스타벅스는 소란스러웠다. 계산대 앞에는 여섯 명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색 카디건을 입은 여지는 빨간 털모자를 쓴 친구와,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과 달콤한 티라미수 케이크 중에서 어떤 것이 맛있는지 토론하고 있었다. 혼자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한 여 자 가수의 배꼽과 그녀가 그것으로 버는 돈, 새로운 다이어트요법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 웅웅거리는 소리들은 원두분쇄기의 요란한 소음에 묻혔다. 캐논볼 애덜리의 색소폰 소리는 스피커를 나오자마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아 사람들의 발길에 차였다. 거리에 면한 창가 자리에 한 남자가 앉아 오늘의 커피를 홀짝 이면서 세종문화회관 쪽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P.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