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장 자크 루소 / 박호성 / 책세상 / 158쪽
(2017. 9. 1.)




   근대 이후 최근 몇 세기를 거치면서 과학과 기술은 과거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수준까지 발달했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그에 못지 않은 부조리와 폐해가 발생했다. 약30년 전에 발표된 로마클럽 제2차 보고서는, 당시의 인류에게 닥친 위기가 자연 재해에서 비롯된 위기가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 만든 위기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인류가 처한 위기는 인간 지식의 산물이 도리어 그 창조자인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문명의 발전이 인간 해방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소외인간의 강력한 토대로 변질된 가능성마저 보인다. 문명과 인간의 부조화는 인류를 또 다른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근대 문명의 위대한 성과는 인간의 삶을 향상시킨다는 낙관적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채 커다란 난관에 가로막혀 있다. 더욱이 문명의 발전에 따른 혜택은 선진국과 소수 특권층만 누리는 반면, 문명의 이면의 부조리와 폐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스란히 받고 있다.
(P.7)


   우리는 어린 시절에 대해 전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 시절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올바른 방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가장 현명한 사람들조차 인간이 알아야 할 중요한 것에만 전념할 뿐, 아이가 현재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아이에게서 인간을 찾으며, 아이가 인간이 되기 전에는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중의를 기울이는 과제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탐구이다. 설령 나의 방법이 전적으로 공상적이며 잘못되었을지라도 나의 관찰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익할 수 있다.
(P.16)


조물주는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했으나, 인가의 손길이 닿으면서 모든 것은 타락하게 된다. 인간은 어떤 땅에 다른 땅의 산물을 재배하거나 이 나무에 저 나무의 열매를 맺게 하려고 애쓴다. 인간은 기후와 구성 요소 및 계절을 뒤섞어버리고 자신이 소유한 개, 말, 노예를 불구로 만든다. 인간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그 형태를 바궈놓으며, 기형적이고 괴상한 것을 좋아한다.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것을 그대로 놓아두길 원하지 않는다. 인간은 심지어 같은 인간조차 자신에게 순종해야 하는 승마용 말이나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휘어질 수밖에 없는 정원운수와 같은 존재로 바꿔버린다.
그러나 이런 변형마저 없으면 모든 것은 더욱 악화될 것이며, 우리 인류는 자신들이 어중간한 상태로 형성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 가운데 홀로 방치되는 인간은 우리 중에서도 가장 기형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편견, 권위, 필요, 모범 사례 등 우리가 빠져들게 되는 모든 사회 제도가 인간 속의 자연, 곧 인간의 본성을 질식시켜 상실되게 만들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우연히 큰길가의 한복판에 놓인 한 그루 묘목처럼, 사방에서 오가는 통행인들에게 치여서 사방으로 휘고 꺽이다가 머지않아 말라 죽게 될 것이다.
(P.23)


   우리는 감수성이 풍부한 존재로 태어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주변 물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 말하자면 자신의 감각을 인식하게 되자마자 그런 감각을 느끼게 만드는 물체를 추구하거나 회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물체가 유쾌하냐 불쾌하냐에 따라서, 다음에는 그 물체가 자신에게 적합하냐 부적ㅂ하냐에 따라서, 마지막에는 이성이 부여하는 행복과 완전함이라는 관념에 근거해서 내리는 판단에 따라서 물체를 추구하기도 하고 회피하기도 한다. 이런 성향은 우리의 감수성이 더 풍부해지고 지식이 늘어나면서 더욱 확대되고 강화된다. 그러나 이런 성향은 우리의 습관에 의해 구속받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편견으로 인해 다소 변화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성향, 그것이 바로 내가 우리 인간 속에 있는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P.26)


   사람들은 자기 아이를 보호하는 것만 생각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이가 인간으로서 자신을 보존하고, 운명의 충격을 견뎌내며, 부유함과 빈곤함에도 의연하고, 필요하다면 아이슬란드의얼음더미 속에서나 몰타 섬의 타는 듯이 뜨거운 바위 위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당신들은 아이가 죽지 않을까 해서 지나치게 조심한다. 그러나 아이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설령 당신이 잘못 보살펴서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닐지라도 잘못 보살폈다는 오해는 여전히 남는다. 아이가 죽지 않게 하는것보다 아이가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P.35)


  인간의 운명은 전 생애에 걸쳐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다. 자신을 보전하려는 노력도 고통과 결부되어 있다. 육체적인 아품밖에 모르는 어린 시절은 얼마나 행복한가! 육체적인 아픔은 다름 아픔에 비해서 훨씬 덜 가혹하고 덜 고통스러운 만큼, 그것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람은 결코 사소한 고통 때문에 자살하지 않는다. 영혼의 고통이 아니면 사람을 절망시키는 것은 거의 없다. 우리는 어린이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긴다. 그러나 정말로 가엾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어른들의 처지이다. 우리의 가장 큰 재난은 우리 자신에서 비롯된다.
(P.49)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운다. 아이는 유아기를 울면서 보내게 된다.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우리는 아이를 쓰다듬어 주거나 안고 흔들어준다. 또 때로는 울음을 멈추게 하려고 아이를 위협하거나 때리기도 한다. 우리는 아이의 기분에 맞추기도 하고, 아이가 우리 기분에 맞추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우리가 아이의 변덕을 다르거나 아이가 우리의변덕을 따르도록 마든다. 중간의선택은 전혀 없다. 아이는 명령을 내리거나 명령을 받거나 둘 중 하나이다. 따라서 아이가 최초로 갖는 관념은 지배 혹은 예속의 관념이다. 아이는 말하기 전부터 명령하고, 행동할 수 있기 전부터 복종한다. 사람들은 종종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능력을 갖추기도 전에 아이에게 벌을 준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일찍부터 어린 마음에 정념을 불어넣고 나서 그 책임을 자연의 탓으로 돌린다. 아이가 나쁘게 되도록 애를 쓴 다음에 아이가 나쁘게 되었다고 한탄하는 셈이다.
(P.49)

​​
  부자들이 겪는 불행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일에 속는다는 것이다. 그가 사람을 잘못 판단한다 해도 그게 그리 놀랄 일인가? 그를 타락시킨 것은 바로 부이다. 그 당연한 결과로서 부자는 자신이 알고 잇는 유일한 수단, 곧 부의 결점을 제일로서 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수단, 곧 부의 결점을 제일 먼저 깨닫게 된다. 부자의 경우 자신이 직접 하는 일 외에는 모든 일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부자가 스스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P.69)


  근대 정치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던 루소가 사망한 지도 이미 2세기가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의 저작을 읽으면서 그를 우리 시대의 문제와 쟁점들에 대단히 가까운 사람처럼 느끼곤 한다. 인간과 사회,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 경제와 정부에 관한 루소의 견해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민은 근대 초기에 이미 싹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근대인이 처음으로 직면했던 정치적, 도덕적 쟁점들을 현대인이 지금 대면하고 있다는 주장은 지나친 독단으로 보이기지는 않을 것이다.
(P.122)


  루소는 <사회계약론>의 첫머리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도처에서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루소가 여기서 말한 쇠사슬이 단지 특정 사회제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 전체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인류의 위대한 성취로 평가받는 현대 문명도 쇠사슬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더 나아가 루소가 말한 자유롭게 태어난 다는 명제조차 위협받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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