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 / 전영애 / 민음사 / 239쪽
(2017.03.03.)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P.7)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들이 하느님이라도 되듯 그 누군가의 인생사를 훤히 내려다보고 파악하여, 하느님이 몸소
이야기하듯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이 어디서나 핵심을 집어내어 써낼 수 있는 양 굴곤 한다. 나는 거럴 수 없다. 작가들도 그래서는 안 되듯이.
그리고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던 작가에게든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한
인간의이야기, 즉 그 어떤 가공의 인물, 있을 수 있는 인물, 이상적인 인물, 어떻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일회적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P.7)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기는 한다. 그리고 느끼는 만큼 수월하게
죽어간다. 나도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좀더 수월하게 죽게 될 것이다.
내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 속에서
소리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P.8)
구원은 전혀 예상치 못한던 쪽에서 왔다.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 작용하고 있다.
우리 라틴어 학교에는 그 얼마 전에 학생이 한 명 새로 들어왔다. 우리 도시로 이사온 어느 유복한 미망인의 아들로 옷소매에 검은 디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나모다 한학년 높았으며 나이도 몇 살 더 들었지만, 곧 모든 학생들처럼 나도 그를 주목했다. 이 이상한 학생은 보기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것 같았고, 그 누구에게도 소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어른처럼, 아니 그냥 어른이라기보다는 신사처럼 낯설고도 성숙하게 우리
유치한 소년들 사이를 오갔다. 인기 있지는 않았다. 놀이에 끼지 않았고 싸움질에는 더더욱 끼지 않았다. 다만 선생님들에게 맞서는 그의 자신감
있고 단호한 어조가 다른 학생들 마음에 들었다.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P.36)
내 인생에서 나에게 흥미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에 이르기 위하여 내가 내디뎠던 걸음들뿐이다.
(P.64)
자신을 다스리고, 나의 길을 찾아내는 것은 내 자신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유복하게 키워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일을 잘 해내지 못했다. 누구나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있어서 이것은 인생의 분기점이다. 자기 삶의 요구가 가장 혹심하게
주변 세계와 갈등에 빠지는 점, 앞을 향하는 길이 가장 혹독하게 투쟁으로 쟁취되어야 하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운명인 이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다. 삶에서 오로지 한 번, 유년이 삭아가며 서서히 와해될 ㄸ, 우리의 사랑을 얻었던 모든 것이 우리를 떠나가려고 하고
우리가 갑자기 고독과 우주의 치명적인 추위에 에워싸여 있음을 느낄 때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나난 것에, 잃어버린 낙원의 꿈에, 모든 꿈 중에서 가장 나쁘고 가장 살인적인 그 꿈에 한평생 고통스럽게 들러붙어
있다.
(P.66)
만약 네가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고 느닷없이 아주 힘을 주고 똑바로 그의 눈을 쏘아보는데도 그가 젼혀 불안해하지
않거든 포기해! 그런 사람에게서는 아무것오 이룰 수 없어. 결코! 하지만 그런 일은 아주 드물어.
(P.76)
<금지되었다>는 것은 그러니까 영원한 것이 아니야, 바뀔 수 있는 거야. 우리들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잇는지. 사실 그것은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늘 그러게 마련이듯이 그런 사람은 살기가 쉬워. 다른 사람들은 운명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느기지. 그들에게는 어느 명예 있는 남자건 날마다 하는 일들이 금지되어 있어.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폄하되는 다른 일들은 허용되어 있어. 그러니
누구나 자기 자신 편에 서야 해.
(P.86)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유년은 나의 주변에서 폐허가 되었다. 부모님은 어느 정도 당황하여 나를 바라보셨다. 누이들은
아주 낯설어졌다. 익숙한 느낌들과 기쁨들을 나에게서 각성이 일그러뜨리고 퇴색시켰다. 정원은 향기가 없었고, 숲은 마음을 끌지 못했다. 내
주위에서 세계는 낡은 물건들의 떨이판매처럼 서 있었다. 맥없고 매력 없이. 책들은 종이였고, 음악은 서걱임이었다. 그렇게 오늘 가을 나무 주위로
낙엽이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비, 태양 혹은 서리가 나무를 흘러내린다. 그리고 나무 속에서는 생명이 천천히 가장 좁은 곳,
가장 내면으로 되들어간다. 나무는 죽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다.
(P.91)
나의 내면의 모습이 그랬던 것이다! 빙빙 돌며 세상을 경멸하던 나! 정신에 있어서 자부심이 충만했고 데미안과 생각을 함께 했던
나! 나의 모습이 그랬다, 취하고 더렵혀지고, 구역질나고 비열한 인간 페물이자 잡놈, 야비한 충동의 기습을 받은 살벌한 야수였다! 모든 것이
정결함, 광채 그리고 우아한 사랑스러움인 저 정원에서온 내가, 바하의 음악과 아름다운 시를 사랑했던 내가! 아직도 속이 메스껍고 격분한 내 귀에
자제력 없이 멍청하게 헉헉 터뜨려내는 취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게 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고통들을 겪는
것에는 상당한 쾌감이 있었다. 그토록 오래 내가 맹목적이고 둔감하게 웅크리고 있었기에, 그토록 오래 내 마음은 침묵하고 가난해져 구석에 앉아
있었기에 그리하여 이러한 자기 고발, 이 전율, 이 모든 영혼의 불쾌한 감정도 환영받았던 것이다. 감정이 있었다! 불꽃이 솟았다. 그 속에서
심장이 경련하였다! 나는 비참의 한가운데서 해방이자 봄 같은 그 무엇을 혼란스럽게 느꼈던 것이다.
(P.99)
"이봐 싱클레어" 그가 천천히 말했다. "너한테 유쾌하지 않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어. 아무려나 어떤 목적으로 네가 지금 네
잔을 마시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 둘 다 알 수 없어.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은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미안하지만, 난 집에 가봐야겠다"
(P.116)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개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P.123)
내가 들은 철학사 강의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방랑과 똑같이 실체 없고 공장식이었다. 모든 것이 찍어낸 것 같았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하는 게 같았다. 그리고 소년티 나는 얼굴들에 어린 달아오른 즐거움은, 보는 사람이 우울할 정도로 텅 비고 기성품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웠다. 나 자신을 위해 온 하루를 쓸 수 있었다. 교외의 오래된 낡은 집에서 조용하고 아름답게 지냈고, 내 책상 위에는 니체가
몇 권 놓여 있었다. 니체와 함께 살았다.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꼈다. 그를 그침없이 몰아간 운명의 냄새를 맡았다. 그와 함게 괴로워했다.
그토록 가차없이 자신의 길을 갔던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행복했다.
(P.178)
전쟁의 외적이고 정치적인 목적들에 대한 물음이 표면에 그치듯이. 깊은 곳에서는 무엇인가가 생성중에 있었다. 새로운 인간성 같은
무엇이.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으며 그들 중 어던 사람들은 바로 내 곁에서 죽었다. 그들에게는 미움과 부노, 살육과 말살이 대상에
매어 있지 않다는 통찰이 느껴졌다. 아니다. 대상들은 목표들과 꼭 마찬가지로, 완전히 우연이었다. 원 느낌, 가장 거닌 느김들도, 적에게 향하여
잇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유혈의 위업은 오로지 내면의, 그 자체 안에서 산산이 파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새로 태어날 수 있기 위하여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
(P.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