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이수영 / 오월의 봄 /
(2016. 12. 18.)



  내게 스피노자의 철학은 온통 발명으로 보였다. 서양 철학에 과문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신'이 그렇고, '속성'이 그러하며, '감정'이 그러하고, '평행론'이 그러했다. 스피노자의 '신체'는 또한 얼마나 위대한 개념이며 '공통개념'은 또한 얼마나 위대한 개념이었던가. <에티카>는 개념의 발명으로 넘쳐나는 텍스트였다. 스피노자는 기존의 개념에 새로운 용법을 설정하는 철학적 발명에서 획기적이었다. 스피노자가 경험했던 증오와 저주, 죄의식과 전쟁들은 이렇게 발명된 개념들과 더불어 완전히 소멸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철학자의 삶이란 무엇이고, 철학이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피노자의 <에티카>처럼 분명하게 보여주는 책은 처음이었다.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증명의 방식이라는 서술 체계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읽어나갔을 때 스피노자의 체계는 삶에 대한 놀랄 만한 아름다움과 긍정으로 가득한 개념들의 발명이었다.스피노자의 개념적 발명과 더불어 나는 삶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다.
(P.9)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신체와 무관한 정신, 혹은 신체에 대해 지배적인 정신, 신체보다 우월한 정신이라는 통념을 비판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정신과 신체를 분리해서 정신에 자유의 의지를 부여하는 이 통념이 오히려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자, 자유의지적인 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수많은 종교적 미신들을 형성한 장본이기 때문이다. 의지도 정신의 한 양태인 한에서 양태들의 인과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신체와 정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 신체의 질서와 정신의 질서가 서로 같다는 것, 신체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가 주장하고 확립하려는 신체론의 골자이다.
(P.186)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된 원인에 의한 파악이다. 원인에 의해 어떤 결과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결과를 원인을 통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적합한 관념이고 참된 인식이다. 들뢰즈에 따를 때 스피노자는 "인간들 자신은 이해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는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원인들에 그 결과를 다시 연결시키면서 그것의 생산과정을 추적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철학적 작업과  현실 분석에 적용하고 있다고 한다. 결과를, 그것을 낳은 원인에 연결시키기, 이 원인에 대한 인식을 통해 결과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기, 이것이 스피노자의 인식론이다.
(P.232)



  기쁨, 슬픔, 욕망은 인간사 모든 감정의 기본 레고 블럭이다. 사랑이든 증오든, 공포든 희망이든, 질투든 정욕이든 모든 감정은 이 세 감정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모든 감정은 인간만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형성되는 자연 법칙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증오나 자만, 질투나 탐욕이야말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라고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회개해야만 사라지는 감정, 징벌의 대상이 되어야 할 감정, 더 이상 존재하지도 말아야 할 인간의 실수, 신적인 계율의 위반, 신의 세계 속에서는 존재할 수도 없는 악마적인 인간의 속성, 스피노자는 인간 감정에 대한 이런 모든 부정의 언사들을 고발한다.
(P.245)




  빛이 빛과 어둠을 구분하는 원칙이듯이 참된 인식만이 참과 거짓의 판별 기준이 된다. 원인에 의한 인식만이 참된 인식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삶이 도덕적이고 부적합한 환상적 관념들에 의해 비틀릴 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바로 이성적 인식과 능동의 삶인 것이다. 좋은과 나쁨의 윤리학, 그것은 선악의 도덕과 그 도덕으로 인해 허무주의적인 저주의 대상이 된 삶을 교정하는 최고의 원리인 것이다.

  인간이 일정 정도 비틀렸을 때, 우리는 이 비틀림의 결과를 기하학적 방식으로 그 원인들에 다시 연결시킴으로써 그것을 교정하게 될 것이다. 이 광학적 기하학은 <에티카> 전체를 관통한다.
(P.294)




  스피노자는 폭력과 공포에만 의존하는 통치를 지속 가능하지 않은 통치라고 비판한다. 비록 국가의 기초에 형벌이라는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정치가 주권자의 폭력에 지배될 때 정치적 안정성은 달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이익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들을 억지로 하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다만 일시적일 수 있을 뿐이다. 비자발적인 굴종 속에서 대중들이 기원하는 것은 오직 통치자의 불행과 통치자에게 악이 될 일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권력의 역전이 가능하게 보일 때는, 다시 말해 통치자의 통치를 전복할 수 있을 때는 그동안 기원해왔던 그 "악"을 직접 실행에 옮기는 것이 대중들의 정치적 본성이기 때문이다.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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