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과 철학 강의 2
김용옥 / 통나무 / 299쪽
(2016. 3. 17.)




  머리가 좋은 사람은 철학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머리가 너무 좋기 대문에 너무 쉽게 사물을 터득하고 그러기 때문에 너무 쉽게 흘려버리는 것 같다. 나같이 머리 나쁜 사람이 오히려 철학하기에는 적합한 것 같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 인가은 모르는 것을 철저하게 모를 때만이 아는 것을 철저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요즈음 학생들에게 걱정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도 많은 것을 너무도 쉽게 알아 버린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때때로 인간을 기만한다. 그리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때때로 무지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나의 경우, 구조적 사고의 결여가 구조적 사고를 잉태시켰다는 아이러니를 독자들은 깊게 되씹어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P.38)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무지로부터의 탈출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지만, 이때 무지를 너무 경멸스러운 그 무엇, 버려야만 할 형편없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를 매우 협소하게 만들 수도 잇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무지에서 탈출해야 하지만, 무지로부터의 탈출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지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순수한 인간의 무지를 너무 무시했다는 데에 소크라테스철학의 한계가 있고, 따라서 희랍철학은 고대 중국의 도가계열의 사상가들이 보여준 무지의 심오한 철학을 달성하지 못했다. 철학이 지혜의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희랍철학은 결국 지혜에 도달하기보다는 지식의 추구에 머물고 말았다. 이것은 희랍철학 전통을 이은 서양인들이 인류에게 남겨놓은 거대한 문화유산인 동시에 거대한 죄악이다.
(P.38)



  철학은 보다 보편적인 것을 지향하지만 아주 절대적인 것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절대의추구라는 것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인간과 우주에대한 진실의 상당한 부분을 잃어버리게 되거나 영영 못보게 되고 만다. 그리고 철학은 정직해야 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모르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 즉 모르는 것을 어디까지 모르는가를 정확히 아는 것처럼 정확한 앎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절대에 관한 서양철학의 주장은 희랍철학의 존재로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의 신학으로 체계화된 매우 특수한 문화적 현상아지 그것이 철학의 필요불가결한 테마는 아니다.
(P.46)



  철학은 상식의 긍정이며 확인이다. 결국 상식의 끊임없는 새로운 해석이다. 움직일 수 없이 확고부동한 너무도 빤한 사실의 끊임없는 확인이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인간의 삶의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처럼 겸손한 것은 없다. 우주를 다 안다고 말하지도 않고 우주의 창조와 종말을 논하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너무도 인간적이다.
  이렇게 겸손한 철학을 여러분들이 배울 수 있는 첩경은 여러분들 자신이 겸손해지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진리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우리마음을 비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마음에 꺼리낌없이 무슨 이야기든지 다 할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P.69)



  칸트라는 위대한 철학자는 실로 위대한 명언을 인류사에 남겼다. '나는 철학(Philosophie)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철학하는 것(philosophieren)을 가르칠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나라의 칸트를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이 칸트의 한마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문제의식 속에서 칸트의 개념이 제기한 어려운 문제들을 풀려고만 노력하고 있는 사람은 칸트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칸트의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오류에 빠져있다. 우리가 칸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칸트의 문제의식이 아니라 칸트가 자기의 문제의식을 해결하려고 노력한 생각의 길, 그 방법, 그 삶의 자세가 되어야할 것이다.
(P.100)



  철학은 사물의 구조를 대상으로 하지만 그 사물의 구조를 인식하는 인간의 마음의 구조에 더 궁극적인 관심을 갖는다. 내가 말하는 마음은 포괄적인 몸이라는 것의 한 양태이지만, 하여튼 그 마음의 구조야말로 현금 철학이 담당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며 타분과과학에 양보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P.110)



  나는 여러분들이 철학을 학 위해서는 우선 마음의 우상들을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상이란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권위의 상징들을 말한다. 이를 좀 더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철학사에서 흔히 말하여지고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우상타파론을 소개하겠다.
  베이컨은 자연과학이 서유럽사회에 자연탐구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등장했을 때 이러한 방법론을 새롭게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또 자연과학적 방법을 통하여 자연과 신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확보해 볼려고 노력한 철학자이다.
  베이컨은 인간의 앎에는 다음의 4가지 우상이 있다고 했다. 우상을 그는 이돌라(Idola)라고 불렀는데, 이돌라라는 것은 희랍어로 거짓된 형상의 뜻이다. 이 4가지 우상을 우리의 지식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인류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P.173)


  이제는 어떻게 철학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철학을 공부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는 나는 생각한다. 하나는 철학을 철학사의 공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하나는 철학을 철학의 문제중심으로 즉 주제별로 공부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객관적 지식의 정확한 흡수가 중요하게되고 후자의경우에는 나의 삶의 체험에 비춘 깨달음이 더 중시된다. 전자가 보다 통시적이라면 후자는 보다 공시적일 것이고, 전자가 보다 객관적이라면 후자는 보다 주관적이 될 것이다.
(P.205)



  철학은 철학하는 것의 결과이며 그러한 결과의 집적이 곧 철학사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확실히 깨달아야할 것은 모든 철학사는 문화사다 라는 사실이다. 모든 철학사는 그 철학사에 흐르고 있는 문화의 역사이다. 그러나 모든 철학사는 또 문화사처럼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보편적 인간의 역사이다. 모든 철학사에서 제기되는 문제, 즉 모든 철학이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상황이지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시도는 필연적으로 문화사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철학의 위대함은 그 문제제기에 있는 것이며, 결코 그 문제해답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제의 해답은 궁극적으로 그 문제를 풀어가는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구조와 그 사회의 문화의 논리에 의하여 규정될 뿐이다.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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