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사의 인식
백기완, 송건호, 임헌영 / 한길사 / 668쪽
(2015. 12. 30.)

 



  1980년대는 책의 시대였다. 폭력적인 권위주의 권력과 대응하는 출판문화 운동이 치열하게 그 엄혹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젊은이들은 책을 읽었다. 80년대에 이 당의 젊은이들은 인문사회과학적 독서를 통해 스스로의 정신과 이론과 사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오늘 우리 국가사회와 민족공동체의 민주화와 진보와 개혁은 그렇게도 치열하게 전개된 출판운동 및 독서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 80년대의 한가운데에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서 있었다. 80년대를 힘차게 산 젊은이들은 해방전후사의 애독자였고, 89년까지 전6권으로 간행되는 '해전사'의 필자들이었다. 특히 해전사의 제1권은 우리 국가사회와 민족공동체의 민주화와 통일문제를 생각하는 젊으이들의 정신과 이론과 사상을 공급하는 한 원천이었다. 80년대는 책을 읽는 젊은이들의 시대였지만 또한 해방전후사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6)

 


  지난날이나 또 오늘날이나 자주적이 못 되는 민족은 반드시 사대주의자들의 득세를 가져와 민족 윤리와 민족 양심을 타락시키고 민족 내분을 격화시키고 빈부 격차를 확대시키며 부패와 독재를 자행하여 민중을 고난의 구렁으로 몰아넣게 마련이다. 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런 여건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미 반세기가 지난 8.15가 도대체 어떻게 민족의 정도에서 일탈해 갔고 그로 말미암아 민중이 어떤 수난을 받게 되었는가를 냉철하게 구명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구명은 결코 지난 역사의 구명이 아니라 바로 내일을 위해 산 교훈이 될 것이다. 8.15의 재조명은 이런 점에서 바로 오늘을 위한 연구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P.20)

 

 

  일제하에 민족적으로 어떤 오점이 있는 사람일수록 히스테리컬하게 반공적이 되고 그 당연한 결과로 이들이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민족을 보호하는 민족주의의 담당 세력처럼 되어 버렸다. 바구어 말하면 본래 민족 주체 세력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마치 그 주체 세력인 것처럼 행세하게 된 것이다. 민족의 '자주'니 '주체'니 하는 말이 우리 사회처럼 요란스런 나라가 없으나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처럼 사대주의가 만연하고 어떤 자주적 행동도 볼 수 없는 나라도 없다. 이들에게 있어 민족주의 하면 '구호'의 민주주의이지 행동의 민족주의가 아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P.39)

 


  미군정 기간은 비록 짧은 시기였지만 그것이 한국의 정치,사회와 경제,문화 등에 미친 영향은 사실상 지대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군정 시기는 그 이후의 한국 정치의 구조를 형성시켰던 기반이기도 했다. 이러한 성격을 가졌던 미군정에 대해서 당시의 한국 지도층이 보여 주었던 움직임은, 미군정의 공과를 비판하기 전에 먼저 이들 지도층에 대한 비판이 우선되어야 할 당위성가지 제공해 주고 있다. 미군정 자체가 보여준 온갖 비리와 부조리를 근본적으로 혁파하고 미군정의 비민족적 영향력으 단절을 철저히 시도해야 할 지도 계층의 인사들 중 일부는 오히려 미군정 이후의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투쟁에만 집착함으로써, 종식되어야 할 미군정적 성격을 그 뒤에까지 지속되게 했으며, 특히 ㅇ리제 친일했던 반민족적 세력을 여전히 존속하도록 방치해 둔 미군정의 책임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정당화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P.78)

 


  백범은 1876년 7월 11일에 세상에 태어나서 1949년 6월 26일 분열주의자의 하수인에게 무참히 저격됨으로써 불행하게도 민족자주통을 위한 싸움의 문턱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 파란만장한 일생은 그대로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전부 포괄한다. 백범이 세상에 태어나던 1870년대로 말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출발 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1853년, 동경만에 침입한 미국 군함 페리호에 굴복하던 치욕을 한민족에게 강요하던 시기였다. 또 백범이 값진 생명을 빼앗기던 1949년은 한민족데 대한 일제으 직접적 지배는 끝났으나 도 다른 외세에 의한 조국 분단이 국내적으로는 남과 북에 각기 이념상으로 상반하는 정부의 수립으로 귀결되고, 이로써 국제적으로는 강대국이 주도하는 냉전의 전략 단위로서 부각되던 시기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그대로 침략과 항쟁, 그리고 해방과 좌절, 그리고 또 항쟁의 내력이었다.
(P.329)

 

 

  91세의 긴 생을 산 이승만도 역사적 기준에서 본다면 결국 '분단과 통일' 그 어느 편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를 따져야 할 것이며, 그 밖의 다양한 평가는 민족사적 의미와는 별개의 것이 될 것이다. 한반도 남쪽에서 오늘 이 시대의 기본 성격의 양면 가운데 한 면인 분단을 만든 가장 결정적 계기는 이승만과 그 지지자들이 정치적 지배력을 확립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한반도 남족에서 오늘 이 시대를 형성함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P.361)

 

 

  몽양 여운형도 민족사의한 장을 피로써 기록하는 결과가 되었다. 몽양은 민주, 시베리아, 상해, 그리고 남양 각지를 여행할 때에도 많은 위험과 고난을 겪었고, 직접 생명을 위협하는 테러를 당한 일도 실로 여러 번 있었다. 몽양의 죽음이 나라와 겨레의 불행과 슬픔을 뜻하는 하나의 큰 참사였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참사는 해방 직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산물이었던 동시에, 당시의 일부 정치인들의 왜곡된 생리 및 심리가 가져온 추악,불미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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