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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 한겨례출판 / 352쪽
(2015. 11. 5.)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 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 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
(P.23)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낵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P.77)

 

 

  "어떤 일이 위대해지려면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어야해.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내가 시대정신을 꿰뚫어봤다는 뜻이 되는 거야.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할 때 그 동기가 그저 순수하기만 했을까. 아무런 정치적 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도스토옙스키가 도박 빚을 갚으려고 <죄와 벌>을 썻다고 해서 그 책의 가치가 달라져?"
(P.144)

 


  완성된 사회라는 것은 구성원 또는 계층 간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완성된 사회는 그런 갈등과 모순이 어느 범위 이내에서 더 커지지 않는 상태로 계속 지속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서구 국가들과 아시아의 일본, 한국은 이런 단계에 도달했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하면서 '완성된 사회'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잇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P.187)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에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어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더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P.191)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달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보다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 기준만 지니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자유민주주의는 교리에 따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치 면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수정자본주의는 시장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 척도를 한 가지만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두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가치 체계에서 한 인간의 가치를 재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 있는가(독재자나 범죄자가 아닌가)'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가치를 갖고 있는가'가 된다.
  따라서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젊은이는 부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려면 돈을 버는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름 사람들에게 그의존재 가치를 증명할 다른 방법이 없다.
(P.194)

 


  공무원들은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하급 공무원들도 그랬고, 국,과장들도 똑같았다. 황당한 지시가 떨어지지 않도록 장,차관의 마음을 교묘히 움직이는 재주가 있는 국,과장들이 능력 있는 상사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니 느는 것은 눈치밖에 없었다. 뭐, 어차피 나는 평생 나보다 젊은 행정고시 합격자들을 영감으로 모시고 살 운명이니 그런 기술을 연마할 필요도 없다. 좀 합리적인 성격의 팀장과 과장들을 모시게 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까라면 까'라는 식의 팀장이 온다고 해도 내가 행사할 수 있는 거부권은 전혀 없었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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