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 생각의 나무 / 459쪽
(2015. 8. 25.)

 

 

 

  길은 산맥의 저편으로 돌아나가 굽이친 저족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는 그 길의 긑에 임금과 조정과 사직은 있었다. 나의전쟁은 나의 죽음으로써 나의 생애에서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분명한 끝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귀 기울이면, 사각 사각 사각, 어두운 수평선 너머에서 내 적들이 노 저어 다가오는 소리는또렷이 들려왔다.
(P.26)

 

 

  권율이 돌아간 뒤, 나는 종을 시켜 칼을 갈았다. 시퍼런 칼은 구름무늬로 어른거리면서 차가운 쇠비린내를 풍겼다. 칼이 뜨거운 물건인지 차가운 물건이지를 나는 늘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칼을 코에 대고 쇠비린내를 몸 속 깊이 빨아넣었다. 이 세상을 다 버릴 수 있을 때까지, 이 방책 없는 세상에서 살이 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새벽에 나는 종에게 칼을 들려서 진주를 떠났다.
(P.33)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 임진년 개전 이래,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믿었다기보다는, 그렇기를 바랐다.
(P.34)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P.118)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강요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 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이리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벌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으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때, 나는 죽어지기 전가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고 나는 늘 살아 있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각오되어지지 않았다.
(P.203)

 


나는 울음을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 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개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개별성이었다. 울으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P.2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