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 창비 / 2014 / 224쪽
(2015. 03. 27.)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작가 띄엄띄엄 발표한 단편을 모은 단편집이다.
우리 사회에 가장 힌든 곳에서 힘들게 살아가 있는 사람들의 하루하루 힘든 삶과 그들의 속사정을 작가는 얘기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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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들어 사내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대신 낮에 거실 소파에서 잠깐씩 눈을 붙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아내는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온다. 점점 더 야위어가는 그녀의 얼굴은 늘 시멘트벽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대화가 끊긴 지도 오래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그의 집엔 커다란 구명이 생겼지만 차마 그 안을 들여다볼 용기가 없다. 구멍 안은 컴컴한 어둔에 잠겨 있고 피에 굶주린 악령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 사내는 구멍이 점점 더 입을 크게 벌려 그의 가족을 모두 집어삼키게 될까봐 두렵다. 하지만 거실 소파에 누워 잠든 봄날 오후, 희미하게 들려오는 딸애의 피아노 소리는 불완전하고 깨어지기 쉬운 세상을 단단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P.13)

 

 

  그날은 누군가 해고통지를 받은 날이다. 동료들은 불운이 자신들을 비껴단 데에 대한 안도감을 애써 감추며 해고된 직원의 어깨를 두드린다.
  걱정 마. 다 잘될 거야.
  하지만 그들은 이미 잘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해고된 사내는 아마도 보험회사나 건강보조식품, 또는 연료절가멪를 판매하는 회사에 다시 취직할 것이다. 그리고 옛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굴욕감을 애써 감춘 채 호의를 구걸할 것이다. 한두번이야 도와줄 수 있지만, 그들의 우정은 거기까지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한번 거치고 나면 더이상 갈 곳조차 없다. 결국 그는 찜질방이나 경마장, 공원 등지를 배회하며 빠르게 몰락해갈 것이다.
(P.23)

 

 

  태초에 생명이 진흙에 숨을 불어넣어 시작됐든, 우주에서 날아온 먼지가 아미노산과 결합해 생성됐든 우리는 분명 그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개체의 죽음은 수없이 반복됐지만 각 개체는 자신의 삶을 유전자에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줬고 죽음을 통한 끝없는 갱신과 진화를 통해 여기까지 온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 고립된 개첸도 아니고 백년도 못 사는 유한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나긴 지구 역사 속에서 하나로 연결된, 수억 수천만년간 이어져온 불멸의 생명체입니다.
(P.94)

 


  스물네평짜리 낡은 임대아파트엔 모두 세명이 살고 있다. 경구과 그의 딸 미숙, 그리고 아들 영민. 그들은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들여오는 시간도 제각각이지만 행여 다들 집에 있더라도 거실에에 모여 텔레비젼을 보거나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 법이 없다. 각자 주방과 화장실을 소리 없이 드나들며 재빨리 제 볼일만 보고 유령처럼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거실은 언제나 어둠에 잠겨 있다. 어쩌다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양 황급히 등을 돌려 달아난다. 그것이 경구네 가족이 살아가는 법이었다.
(P.113)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의 묘비명에 어떤 문구가 새겨지길 원하느냐'는 질문이었는데 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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