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어린이에게 길을 묻다
김상욱 / 창비 / 288쪽
(2015. 02.07.)

 

 


  우리네 삶은 길고 지루한 일상만으로 잔뜩 메워져 있지만도 않습니다. 누구나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물녘 별이 하나둘 돋아나듯, 빗차는 순간들이 내 삶에도 깊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그 순간은 비록 짧게 스치고 지나가기만, 삶 전체의 의미를 뚜렷하게 밝혀줍니다. 마치 어둔 밤 한줄기 번개가 산과 강, 들판과 마을을 짧게 , 그러나 한꺼번에 비춰 보이듯이. 저는 삶이란 길고 지루한 일상과 섬광처럼 빛나는 아주 황홀한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거듭 느낍니다. 그 순간이 삶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에, 그 순간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끈히 한 생애를 힘주어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영화나 드라마가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미 스치고 지나간 그 순간을 오래도록 응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P.16)

 


  정작 영화나 드라마는 어느 정도의 장삿속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만만치 않은 제작비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진정한 표정을 담고 있는 빛나는 순간들을 드러내 보일 때조차 상업적인 기획은 교묘하게도 우리가 마주치는경험세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미화함으로써 왜곡합니다. 삶의 진정성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져야만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조작된다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겪는 생의 충만한 고통과 기쁨이 아니라, 한번 걸러진 보편적인 경험이 될 따름입니다.
  결국 생의 빛나는 순간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다른 예술에 기대야만 합니다. 무릇 모든 예술, 모든 진정한 예술은 생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순간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한 예술가의 눈으로 이 탐구를 진척시켜 나갑니다. 아도르노라는 독일의 미학자가 말한 대로 "서정성에 깊이 닻을 내리면 흔쾌히 서사성과 마주치게 된다"는 것도 이러한 의미일 것입니다. 한 예술가의 독특하고 구체적인 느낌으로 표현되는 서정성이 어느새 모든 살아가는 사람들의 느낌과 아름답게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구미에나 맞는 보편적인 틀을 먼저 설정하고, 여기에 억지로 구체적인 느낌을 담아낸 장삿속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예술의 본질인 것이지요.
(P.17)

 

 

  좋은 작품이 바꾸어놓는 아이들의 삶은 사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갑작스러운 변화는 다만 변화된 몸짓일 따름이다. 참으로 진정한 변화는 나무가 자라듯 보이지 않게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삶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P.31)

 

 

  그림동화란 글과 그림이 함께 제시되어 있는 동화다. 물론 일반적인 동화에도 글과 그림이 함께 있다. 그러나 이들 동화에는 그림이 독자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며, 다만 글의 이해를 돕는 부차적인 기능, 곧 삽화라는 말 그대로 이해를 돕기 위해 덤으로 끼워진 그림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림동화의 그림은 글의 보조장치가 아니라 독자적인 풍부함과 구체성을 지니고, 서사를 진행하거나 장면을 제시하는 기능을 감당한다.
(P.78)

 

 

  그림동화의 중요성은 그 예술적 특성때문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림책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아주 특별한 예술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그림동화에는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보내는 무한한 애정과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 그림동화를 통해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앞질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어린이들은 그림책이라는 독특한 예술과 마주침으로써 삶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며, 삶에 스며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마음껏 향유하게 된다.물론 좋은 그림동화에 한정된 말이기는 하지만. 더욱이 그림동화는 어린이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책이다. 그것은 곧 가장 먼저 만나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림동화를 통해 어린이들은 앞질러 세상을 만나고, 무엇이 소중하며 아름다운지를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된다. 처음 세상을 만날 때의 그 경이는 누구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일 것이다. 하물며, 그 세상이 아름다운 색채와 형상으로 충만하기에 어린이들의 정서 속에 더 깊이 닻을 내릴 것임은 분명하다.
(P.81)

 

 

  그림동화는 다른 동화책과 달리, 책꽂이에 꽂기가 영 성가시다는 점이다. 다른 책들은 가지런히 꽂히는데, 그림동화들은 들쭉날쭉하며 여간 거치적거리는 것이 아니다. 이리저리 채여 귀퉁이가 망가지기 쉬운데도 왜 그림동화들은 판형이 서로 다를까? 그것은 무엇보다 담아내는 세계가 그림미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P.94)

 


  현실은 동화 속 세상보다 언제나 더욱 힘겨운 곳이다. 그러나 동화 역시 그 어려움에 견고하게 밀착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실과 동화 속 세상은 나란히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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