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 돌베개 / 420쪽
(2015. 01. 07.)

 


 

  역사가들이 일하는 방식도 언론인과 다르지 않다. 역사가도 각자 나름의 개성과 취향이 있고 서로 다른 욕망과 감정에 끌리며 저마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과거의 사실 가운데 자신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선택해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사실의 선택과 선택한 사실의 해석, 역사 서술의 핵심인 두 가지가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를 둘러싼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역사 중에서도 현대사는 특별히 민감하다.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현재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주역들이 살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죽고 없더라도 그들의 행위로 인해 억울하게 고통을 겪었거나 정당한 또는 부당한 이익을 얻은 사람들은 살아 있다. 우리는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과 그들이 한 행위에 대한 강한 호불호의 감정을 느낀다. 그들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왕처럼 느긋하게 대하지 못한다.
(P.9)

 

 

  나는 고령 유권자들이 투표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과 시대를 인정 받으려 했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일제강점과 해방공간의 혼란, 참혹한 전쟁과 절대빈곤의 고통을 견뎌내고 기나긴 군사독재의 시대를 통과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산업화화 민주화를 이룸으로써 대한민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후 빈손으로 노후를 맞았다.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그 삶과 시대를 인정받으려는 소망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년 2012년 12월에는 그것 말고는 적절한 표현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가설을 2012년 대선 결과를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P.22)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말을 한다. 역사가는 제멋대로 사실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지만 사실의 노예인 것도 아니다. 사실과 역사가는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기의 사실을 가지지 않은 역사가는 뿌리 없는 풀과 같고 자기의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죽은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전문 역사연구자가 쓴 민족사에서부터 평범한 시민이 쓴 소박한 개인사까지 다 마찬자지다. 역사는 어떤 사실을 선택해서 어떤 관계를 맺어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P.29)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힘이 욕망(desire)이었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 때문인지 사람들은 욕구라는 말을 선호한다. 하지만 뭐라 부르든 상관없다.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든 힘은 국미이 개별적,집단적으로 분출한 욕망이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며,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욕망이다. 사람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안고 산다. 만약 모든 욕망을 다 채워서 어떤 결핍도 느끼지 않는다면 더는 행동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새로운 욕망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P.52)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서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중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행위가 된다. 단, 민중의 저항권 행사는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우는 데서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포퍼의 주장이다. 대한민국의 정치혁명은 바로 그런 혁명이었다. 4.19혁명과 6월 민주항쟁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운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었다.
(P.178)

 

 

  최근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P.188)

 

 

  우리는 국가의 부속품이 아니며 대통령의 부하도 아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위해 있는게 아니라 대한민국이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빋는다. 사람은 그 어떤 위대한 이념이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 때 행복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존엄한 인간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엄성을 확신하는 것과 똑같은 무게로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자유주의적 각성'이라고 부른다.
(P.280)

 

 

  미래는 아직 오직 않은 것잉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았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우리 안에 만들어야 할 좋은 것의 목록에는 역사에 대한 공명도 들어 있다. 우리가 만든 대한민국현대사의 갈피마다 누군가의 땀과 눈물, 야망과 좌절, 희망과 성공, 번민과 헌신, 어리석은 악행과 억울한 죽음이 묻어 있다. 그 55년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나는 그 모든 것에 공명하고 싶어하는 동 시대의 벗들에게 말하고 싶다. 벗이여, 미래는 우리 안에 이미 와 있습니다!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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