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 다이앤 K. 오스본(편) / 박중서 / 갈라파고스 / 464쪽
(2014. 1. 10.)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조지프는 종종 이렇게 묻고 나서 곧 스스로 답하고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죠." 카를 융과 마찬가지로 조지프는 노년기를 인생의 감소기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개의 시기로 보았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 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 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노녀의 문턱에 도달해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욕구 때문에 눈길을 자꾸 뒤로 돌리게 될 것이다. 융의 말마따나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
(11)

 

 

  단테는 연옥을 통과해 나오면서 그곳의 강물을 마심으로써 자신의 모든 죄를 기억 밖으로 씻겨 나가게 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 주는 강물을 마셨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는) 심지어 죄에 대한 기억조차 완전히 망각해야 했던 것이다.
(59)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쇼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칸트도 읽었다. 일단 거기까지만 가도 되긴 했지만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괴테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 가지 흥미진진했던 사실은 조이스 역시 이들과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물론 조이스가 쇼펜하우스의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어도, 나는 조이스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나는 융을 읽었고, 그의 사고 체계가 근본적으로 슈펭글러의 사고 체계와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이 모든 것을 한데 버무리기 시작했다.
(88)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정말로 어찌할 수 없다. 내겐 아무런 철학도 없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우리는 함께 존 듀이를 공부했다. 카멜 도서관에서 나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두 권 짜리 <서구의 몰락>을 꺼내 들었는데, 이런, 세상에! 거기 적힌 내용은 벼락과도 같았다. 슈펭글러는 말했다. "젋은이여, 만약 그대가 미래의 세계에 있고 싶다면, 자신의 그림붓과 시 쓰는 펜일랑 선반 위에 얹어 두고, 멍키 스페너나 법전을 집어 들어라." 나는 스타인벡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것 좀 한번 읽어 보세요." 나는 그 책의 제1권을 다 읽은 다음에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잠시 후에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이 책 절대 못보겠는걸. 아, 내 예술을 어쩌나." 그는 거의 2주 동안이나 한방 먹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 좀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92)

 

 

 

  조이스의 소설에서처럼, 그리고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처럼, 진보의 열쇠는 내부에 있는 무언가를 강조하는 것에 놓여 있다. 조이스의 소설 속 주인공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때 거기에 그물을 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 한다. 너는 나에게 국적이니, 국어니, 종교니 하고 말하지만, 나는 그 그물에 빠져 나가 도망치려고 노력할 거야."
(p. 108)

 

 

  죽음과 낳음은
  동시에 다가온다.

  오직 탄생 - 낡은 것의 탄생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 - 만이 죽음을 (진정으로)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서, 사회의 내부에서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팔링게네시아)'이 있어야 하며, 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p. 144)

 

 

  조이스는 『율리시즈』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다섯 개의 손가락을 통과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대무이고, 그렇지 않으면 문이다." 우리가 접하는 어려움 역시 닫힌 문이 아니라, 오히려 활짝 열린 대문으로의 변화 가능서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리라.
  여러분이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차단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어떤 구체화된 상징에 있다고 여겨질 경우, 명상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체계적인 훈련이 된다. 이상적인 명상의 기능은 구체화된 답변을 초월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된다.
(p. 223)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없다.
(p. 304)

 

 

  운명의 수레바퀴에서는
  지혜가 한가운데를 가리킨다.
  젊음은 가장자리를 가리킨다.
(p. 380)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p. 383)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 '주관적 의미'에서 보자면 오래되고, 영원하고, 끊임없는 신화이며, 기억되는 과거나 투사되는 미래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현재이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이는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즉 특정한 '민족들'의 아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즉 개인이 스스로를 이 아름다운 행성 표면의 특정한 장소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자아로서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신 - 각자 자기 나름대로, 모두와 (경계없이) 하나가 되어 - 의 중심으로서 각성하도록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p.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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