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 양억관 / 민음사 / 440쪽
(2013. 12. 22.)

 

 


사람들은 자신이 알던 알지 못하든 누구나 자신만의 색채를 갖고 있다. 자기만이 특별한 색채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에게 하루키가 부여한 색채는 어떤 색일까....
하루키에 대한 인연이 특이한것 같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처음 읽은 책이 '1Q84'이고 고전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처음 들게해 준 책은 '상실의 시대'였다. 올해의 마지막 책이 하루키 책이 된것도 우연이었을까? 도서관 책꽂이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하루키의 신간을 발견했을때의 그 소소한 기쁨을 간직하며 올 한해 책읽기는 이것으로 마무리!!

 

쓰쿠루는 일본어로 作의 발음이다.
만들다는 뜻이란다. 창조의 創과 같은 발음이라고 한다.
쓰크루의 아버지는 이 두가지 단어 중 하나를 고민하다가 作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름에 색채가 들어있는 모든 인물들과는 다르게 색채없는 쓰쿠루는 어쩌면 이 모든 색채를 한데 어울어 지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색채없는 다카키 스쿠루의 색채를 찾아 떠난 여행
자신의 색깔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다카키의 자기의 색채를 찾아 떠난 여행
===========================

 

 

   다자키 쓰쿠루를 제외한 다른 넷에게는 아주 사소하고 우연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름에 색깔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남자 둘은 성이 아카마쓰(赤松)와 오우미(靑海)이고 여자 둘은 성이 시라네(白根)와 구로노(黑야??)였다. 다자키만이 색깔과 인연이 없었다. 그 때문에 다자키는 처음부터 미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물론 이름에 색깔이 있건 없건 그 사람의 인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건 잘 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애석하게 생각했고, 스스로도 놀란 일이지만 꽤 상처를 받기도 했다. 다른 넷은 당연한 것처럼 곧 바로 서로를 색깔로 부르게 되었다.
(P. 13)

 

 

"사고란 수염 같은 것이다. 성장하기 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분명 누군가가 한 말 같은데." 쓰쿠루가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볼테르입니다." 하고 연하의 학생이 말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웃음이 밝고 티 없이 맑았다. "그렇지만 그 말은 딱 맞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난 아직 수염은 거의 없지만 어릴 적부터 사색하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과연 그의 얼굴은 매끈한 것이 수염의 흔적도 없었다. 눈썹은 가늘고 짙었으며 귀는 아름다운 조개껍질처럼 또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볼테르가 하고자 했던 말은 사고보다 오히려 성찰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하고 쓰쿠루가 말했다.
상대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성찰을 낳는 것은 아픔입니다. 나이도 아니고, 하물며 수염은 더더욱 아니죠."
그의 이름은 하이다였다. 하이다 후미아키(灰田文紹).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여기에도 색이 있는 인간이 있다.'라고 쓰쿠루는 생각했다. 미스터 그레이. 회색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색깔이기는 하지만.
(p. 69)

 

 

어떤 피아노 곡 레코드를 듣다가 쓰쿠루를 예전에 들어 본 적이 있는 곡이란 것을 깨달았다. 제목은 몰랐다. 작곡가도 몰랐다. 그렇지만 조용하고 애절함이 가득한 음악이었다. 시작이 단음으로 천천히 이어지는 인상적인 테마. 그 안온한 변주. 쓰쿠루는 읽던 책에서 눈을 들어 무슨 곡인지 하이다에게 물었다.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예요.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의 제1년, 스위스에 들어 있죠.
"내가 아는 여자애가 자주 그 곡을 쳤거든.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는데."
"나도 옛날부터 이 곡을 좋아했아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곡은 아니지만요 그 친구라는 분, 피아노 잘 쳤어여?"
"이 피아니스트는 누구야?"
"라자르 베르만(Lazar Berman).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인데 섬세한 심상 풍경을 그리듯이 리스트를 치지요. 리스트의 피아노 곡은 일반적으로 기교적이고 표층적이라는 평을 받아요. 물론 개중에는 기교 위주의 작품도 있지만 전체를 주의 깊게 들어 보면 내면에 독특한 깊이가 깔려 있다는 걸 알게 되죠. 그러나 그런 것들은 대부분 장식 속에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어요. 특히 이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이 그래요.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가운데에서 리스트를 올바르고 아름답게 표현해 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비교적 요즘 사람 가운데에는 베르만이 뛰어나고, 예전 사람 가운데서는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iu) 정도가 아닐까 해요.
(p. 78)

 

 

"물론 재능이란 덧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걸 최후의 순간까지 지탱하는 인간은 거의 없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나 거기서 태어나는 것은 가끔씩 정신의 위대한 도약을 이루어 냅니다. 개인을 넘어 보편적인, 거의 독립적인 현상으로서."
(p. 105)

 

 

"따져 보면 참 기묘한 이야기야. 그렇게 생각 안 해?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무관심한 시대를 살면서도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해 대량의 정보에 둘러싸여 있어. 마음만 먹으면 그런 정보를 간단히 살펴볼 수 있는 거야. 그러면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사실은 거의 아무것도 몰라."
(p. 167)

 

 

아카가 말했다. "난 이렇게 생각해. 사실이란 모래에 묻힌 도시 같은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래가 쌓여 점점 깊어지는 경우도 있고, 시간의 경과와 함께 모래가 날아가서 그 모습이 밝게 들어나는 경우도 있어."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스는 없어."쓰쿠루는 사라의 말을 떠올리고 그것을 외우듯이 말했다.
아카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p. 229)

 

 

여행 준비를 끝낸 다음, 오랜만에 리스트의 「순례의 해」레코드를 꺼냈다.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하는 세 장짜리 LP. 15년 전 하이다가 남겨 둔 것이었다. 그는 거의 레코드를 들을 목적 하나만으로, 아직도 구식 레코드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었다. 첫 장을 턴테이블에 올리고 2면에 바늘을 올렸다.
제1년 스위스. 그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르 말 뒤 페이」는 그 소곡집의 여덟 번째 곡이고, 레코드에서는 2면의 첫 번째였다. 그는 그 곡부터 듣기 시작하여 제2년 이탈리아의 네 번째 곡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제47번」까지 듣곤 한다. 거기서 레코드가 끝나고 바늘이 자동으로 올라간다.
「르 말 뒤 페이」. 조용한 멜랑콜리가 어린 그 곡은 그의 마음을 감싼 형체 없는 슬픔에 조금씩 윤곽을 그려 준다. 마치 허공에 잠겨 든 투명한 생명체의 표면에 수없이 많은 가느다란 꽃가루가 달라붙어 전체 형상을 눈앞에 조용히 떠오르게 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이윽고 사라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민트 그린의 반소매 원피스를 입은 사라.
가슴의 동통이 다시 살아났다. 격렬한 통증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격렬한 통증의 기억이다.
(p. 288)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에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의식의 꼬리에 매달린 빛이 멀어져 가는 마지막 특급 열차처럼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작어지더니 밤 가운데로 빠져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p. 4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