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토마스 벌핀치 / 이윤기 / 창해 / 769쪽
(2013. 8. 4.)

 

 

 

  사람들은 묻는다.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 웬 신화인가>하고 묻는다. 신화는, 모둠살이가 꾸는 꿈이다. 어느 나라의 신화가 되었든, 그 나라의 신화에는 그 나라 사람들의 원망이 고스란히 투사되어 있다. 과학은 그 꿈을 실현시키는 힘이다. 사람들의 꿈을 읽지 않는 과학이 무슨 소용인가? 마르크스는, <신화는 상상력을 절묘하게 부려, 자연을 형상화하거나 자연의 정복을 꾀한다>고 주장한다. 유물론자 마르크스에게까지도 과학사는 과학의 <신화 따라잡기> 역사다.
(p. 10)

 

 

  거칠게 말하면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신들이 사라진 이 시대에 <신화>라는 말은, 두 가지의 두드러지는 영례를 거느린다. 한 기업이나 개인의 성취를 두고 우리가 흔히 쓰는, <신화적인 인물>할 때의 <신화>가 그 하나인데, 이 때의 <신화>는, 신화 시대에나 있을 법한, 도무지 범용한 인간들의 모듬살이에서는 일어남직하지 않는 일을 성취시켰음을 뜻한다. 이 용례에서 <신화>는 <고대 신화>라고 할 때의 <신화>라는 말의 본 뜻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다.
(p. 11)

 

 

  신화는 진리일 수 있는가? 거짓일 수도 있는 이 신화를 두고 많은 학자들은 <진리>를 말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신화학자 제러마이어 커틴은, <영혼이 유신과 동행하듯이 진리와 동행하는 것을 신화>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자예프에 따르면 <종교적인 삶은 신화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신화만이 종교적인 삶을, 살아있는 개인의 격정적인 운명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에 따르면 신화는 무의식적 인식과 의식적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교량이다. 이 교량을 건너다니지 않는 한, 우리 정신 살림은 절반 밖에 이루어지지 못한다. 조셉 캠벨에 따르면, <꿈은 개인의 신화, 신화는 모듬살이의 꿈>이다. 나는 인도인 철학자 아난다 쿠마라스와미가 내린 신화의 정의를 가장 좋아한다.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면, 신화의 언어가 그 언어에 가장 가까이 있다.」
(p. 12)

 

 

  우리의 젊은 독자들이 이 책을 재미있는 심심풀이로 생각해 줄 것으로 확신한다. 나이가 든 독자에게는 유익한 독서의 반려, 여행하거나 박물관이나 미수로간을 찾는 분들에게는 회화나 조각 작품의 해설서, 교약 있는 모임에 자주 어울리는 분들에게는 이따금 주고 받는 인유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열쇠가 되어 줄 것으로 믿는다. 마지막으로 인생을 오래 살아온 노인들에게는 문학의 여로를 되짚어가게 하여 아득한 유년 시절에 이르게 하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마다 인생의 새벽과 만남을 소생시키는 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을 것이다.
(p.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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