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 와이즈베리 / 336쪽

(2013. 03. 21.)

 

 

  이 책은 독자에게 돈과 시장을 둘러싸고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가 직면한 윤리적 딜레마를 숙고할 것을 요청한다. 지난 세대에 한국은 인상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세계를 주도하는 경제국가 반열에 올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은 시장 경제를 수용해서 엄청난 부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 경제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근래 들어서면서 경제의 성공에 부수적으로 생겨난 난제로 고민하고 있다. 따라서 증가하는 각종 불만들을 어떻게 완화할지, 공정한 사회를 어떻게 구축할지, 시장가치가 가족․ 지역사회 ․공공선을 훼손하거나 잠식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바로 이러한 난제들을 다루고 있다.
(p. 8)

 

 

  시장지상주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시장이 과연 위험을 효율적으로 분산하는 능력을 가졌는가에 대해 의심받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시장이 도덕에서 분리되고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시장과 도덕을 다시 연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과 주장이 무슨 의미인지, 이에 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시장지상주의의 핵심에 담긴 도덕적 결점은 탐욕이고, 이 때문에 무책임하게 위험을 무릅쓰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대로라면 해결책은 탐욕을 억제하고, 은행가와 월가의 중역들에게 더욱 품위있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라고 촉구하고, 합리적인 규제안을 마련해 유사한 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p. 23)

 

 

  우리가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불평등과 부패다. 우선 불평등에 관해 생각해보자. 모든 것이 거래 대상인 사회에서 생활하기란 재산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욱 힘들다. 따라서 돈으로 살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유리가 부유한지 가난한지가 더욱 중요해진다.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고파는 세상에서는 돈이 모든 차별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거래 대상으로 삼기를 주저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설명하기가 더욱 어렵다. 두 번째 이유는 불평등과 공정성이 아니라 시장의 부패 성향에 관한 것이다. 삶 속에 나타나는 좋은 것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는 그것을 오염시킬 수 있다. 시장이 단순히 재화를 분배하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교환되는 재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드러내면서 부추기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 책을 읽게 하는 행위는, 아이들을 독서에 힘쓰게 만들지는 모르나 독서를 내재적 만족의 원천이 아니라 일종의 노동으로 여기도록 한다.
(p. 26)

 

 

  시장지상주의 시대에는 이러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하지도 않은 채, 우리는 시장경제를 가진(having a market economy) 시대에서 시장사회를 이룬(being a market society) 시대로 휩쓸려왔다.
  두 개념의 차이는 이렇다. 시장경제는 생산활동을 조직하는 소중하고 효과적인 도구다. 이에 반해서 시장사회는 시장가치가 인간활동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간 일종의 생활방식이다. 시장사회에서는 시장의 이미지에 따라 사회관계가 형성된다.
(p. 29)

 

 

  현대 정치는 도덕적 논쟁이 지나치게 많아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적어서 문제다. 오늘날 정치판은 도덕적·정신적 내용이 거의 비어 있기 때문에 과열되어 있다. 또한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중대한 질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p. 32)

 

 

  재화에 대한 가치판단이 배제된 태도가 시장논리의 핵심이며, 시장이 지닌 매력을 상당 부분 설명해준다. 하지만 시장을 포용하면서 도덕적·정신적 논쟁을 꺼리는 태도 때문에 우리는 무거운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러한 태도가 공적 담론에서 도덕적 에너지와 시민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오늘날 많은 사회를 괴롭히는 기술관료 지향의 경영정치가 발달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p. 33)

 

 

  ‘선착순’의 개념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약간의 돈만 더 내면 공항 보안검색대든 놀이공원의 인기 놀이기구든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 없이 빨리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불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재화를 분배하는 시장논리가 ‘선착순’이라는 전통적 관행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차례대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미덕이 지니는 가치는 무엇이며 이것이 시장논리에 지배당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p. 35)

 

 

  부패라고 하면 흔히들 부정 이득을 연상한다. 하지만 부패는 뇌물이나 불법 거래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어떤 재화나 사회 관행을 부패 시키는 행위는 그 평판을 깎아내리는 행위고, 가치를 합당한 수준보다 낮게 평가하는 행위다.
(p. 59)

 

  어떤 행위는 불쾌하게 여겨지지 않는데, 돈을 지불하고 얻는 새치기 권리, 대리 줄서기, 암표 거래 등과 같은 사례를 불쾌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시장적 가치는 어떤 재화는 손상시키기도 하지만 어떤 재화에는 적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정 재화를 시장논리로 분배할지 줄서기로 분배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분배할지 결정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재화인지, 어떻게 가치를 매길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p. 60)

 

  최근 수십 년 동안 전통적으로 비시장 규범이 지배했던 삶의 영역에까지 시장과 시장 지향적 사고가 확대되고 있다. 비경제적 재화에 가격을 매기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이와 동시에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더욱 추상적이면서도 야심적으로 수정하고 있다. 과거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저축과 투자, 금리와 해외 무역처럼 명백히 경제적인 주제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요즘 경제학자들은 더욱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들은 경제학이 단순히 물적 재화의 생산과 소비를 파악하는 통찰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인간행동을 설명하는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은 눈앞에 놓인 선택사항에 대해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고 자신에게 최대의 행복이나 효용을 안겨주리라 생각되는 것을 선택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다.
(p. 77)

 

 

  과연 인간의 모든 행동을 시장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경제학자, 정치학자, 법학자 등이 이러한 문제를 놓고 지속적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학계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시장 개념이 매우 강력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사회적 관계도 시장관계의 개념에 맞추어 놀라울 정도로 수정되었음을 목격해 왔다. 이러한 변화가 생겨난 한 가지 이유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금전적 인센티브의 사용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p. 80)

 

 

  벌금과 요금의 차이는 무엇일까? 벌금은 도덕적으로 승인 받지 못하는 행동에 대한 비용이고 요금은 도덕적 판단이 배제된 단순한 가격이다. 사람들은 벌금을 요금으로 대할 때 벌금이 나타내는 규범을 무시한다.
(p. 99)

 

 

  경제학자들은 선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장논리의 관점에서 보면 선물보다 현금을 주는 편이 낫다. 그러나 선물 대신 돈을 주면 선물의 의미가 퇴색된다. 돈으로 친구를 살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우정을 유지하는 사회적 관행을 상품화하면 공감·관용·배려 같은 규범의 자리에 시장가치가 들어선다.
(p. 143)

 

 

  사회적·경제적 삶에서 이타주의를 무모하게 사용하면 다른 공공의 목적을 위해 써야할 공급량이 고갈되는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가족과 친구를 위해 남겨두고 있는 이타주의까지 감소시킨다.
  미덕에 대한 경제주의의 견해는 시장에 대한 신념을 불타게 하고 원래는 속하지 않았던 영역으로 시장을 확대시킨다. 하지만 비유가 잘못되었다. 이타주의·관용·결속·시민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 시장 지향 사회의 결함 중 하나는 이러한 미덕이 쇠약해지게 방치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공 삶을 회복하려면 좀 더 부지런히 미덕을 행사해야 한다.
(p. 179)

 

 

  기업의 명명권과 더불어 호사스러운 스카이박스(경기장 높이 위치한 고급 관람석) 거래가 확산되면서 스포츠 경기에 담겼던 시민정신은 훨씬 더 심하게 잠식당하고 있다. 내가 1960년대 중반 미네소타 트윈스의 경기를 관람하러 갔을 때만 해도 가장 비싼 좌석과 가장 싼 좌석의 가격 차이는 2달러에 불과했다. 사실상 20세기에도 야구경기장은 기업 임원과 블루칼라 노동자가 나란히 앉아 경기를 관람하고, 핫도그나 맥주를 사기 위해 모두 똑같이 줄을 서며, 비가 오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젖는 곳이었다. 하지만 경기장 높은곳에 자리한 스카이박스가 등장하면서 부자와 특권계층은 아래의 일반 관람석에 앉는 보통사람들과 분리되었다.
(p. 238)

 

 

  어린 시절에 소비 사회를 지향하는 기본 훈련을 많이 받은 학생들에게 주변 세상에 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가르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이들이 걸어다니는 광고판이 되어 로고·라벨·라이센스 의류를 선전하며 등교하는 시대에, 학교가 소비지상주의 정신에 흠뻑 젖은 대중문화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그만큼 중요하기도 하다.
(p. 272)

 

 

  우리는 반대에 부딪힐까봐 두려워서 자신의 도덕적·정신적 확신을 공공의 장애 내보이기를 주저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맞서지 않고 뒷걸음질 친다고 해서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시장이 우리 대신 결정을 내리도록 허용하게 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얻은 교훈이다. 시장 지상주의 시대는 공공 담론에 도덕적·정신적 실체가 상당히 부족했던 시대와 일치한다. 시장을 제자리에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 관행과 재화의 의미에 관해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숙고하는 것이다.
(p. 274)

 

 

  사회 전반에 걸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불평등이 점차 심화하면서 모든 것이 시장의 지배를 받는 현상은 부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 점차 분리되고 있다는 의미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시민에게 공동체적 생활을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려면 배경·사회적 위치·태도·신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매일 생활하면 서로 마주하고 부딪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의 차이를 견뎌내고 이를 놓고 협상하고 공공선에 관심을 쏟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결국 시장의 문제는 사실상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싶은가에 관한 문제다.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도덕적·시민적 재화는 존재하는가?
(p.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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