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세익스피어 / 김재남 / 하서
(2012. 10. 06.)
늘 아버지께 매달리곤 하시던 어머니, 애정을 먹으면 먹을수록 욕심이 늘어가듯이. 그러던 것이 채 한달도 못 돼서. 아예 생각지 말자. 여자란 할 수 없군! 겨우 한 달. 니오베 여신처럼 온통 눈물 속에 아버지 영구를 따라가던 신발이 닳기도 전에, 아, 어머니가, 도대체 우리 어머니가 저 숙부의 품에 안기다니. 사리를 분간 못 하는 짐승이라도 그보다는 슬퍼했을 게 아닌가. 한 형제라곤 해도 나와 헤르쿨레스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자하고, 한 달도 못 가서 거짓 눈물의 벌게진 눈에서 소금기가 가시기도 전에 결혼을 하다니. 야, 더럽게도 빠르구나. 어떻게 그처럼 재빨리 더러운 이부자리로 달려간담! 좋지 못해, 절대로 좋지 못할거다.
(p. 19)
오필리어야, 부디 명심해야 한다. 아무튼 애정 뒤에 물러서서 정욕의 화살을 피하는 거다. 정숙한 처녀는 달님 앞에 얼굴을 내놓는 것조차 망측스게 여긴다잖니. 열녀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험담이란다. 봄날의 새싹은 움트기도 전에 벌레한테 먹히며, 이슬 어린 청춘의 아침엔 독기 찬 해독을 입기가 쉽다잖니. 그러니 조심해라. 조심하는 게 상책이다. 청춘이란 상대자가 없어도 저절로 욕정이 얼어난단 말이야.
(p. 26)
몇 마디 훈계를 해줄 테니, 단단히 명심해 두어라. 알겠지? 마음속의 생각을 함부로 입밖에 내지 말며, 엉뚱한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잡스러워선 안 되고, 일단 사귄 친구라면 쇠사슬로 마음속에 매두어라. 그렇지만 새파란 햇병아리 새끼들과 악수를 일삼다간 손바닥만 두꺼워진다. 싸움을 하지 말 것이며, 일단 하게 되면 상대방이 앞으로 너를경계할 정도로 철저히 해둬라. 누구의 말에나 귀를 기울이되 네 의견은 삼가라. 즉 남의 의견은 들어주되 시비 판단은 감가란 말이다. 옷엔 지갑이 허락하는 데까지 돈을 써도 좋지만 괴상하게 치장해선 안 되며, 값지되 화려해선 안 돼. 그리고 옷이 날개라잖니. 프랑스에선 상류계급이나 세련된 인사들은 이 방면에 탁월하다더라. 그리고 빚을 지지도 말고 돈을 꾸어 주지도 마라. 돈을 꾸어 주면 돈과 사람을 둘 다 잃고, 빚을 지면 절약하는 마음이 무디어진다. 무엇보다도 네 자신에게 충실해라.
(p. 27)
남자의 맹세란 겉빛깔과는 달라. 수치스런 욕망을 달성하려고 말로는 신성한 체, 거룩한 체하며 여자에게 불의를 권하는 뚜쟁이 같다고나 할까. 그러기에 더 잘 속는단 말이다.
(p. 29)
삶이냐 죽음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는 것이 장한 것이냐, 아니면 환난의 조수를 두 손으로 막아 이를 근절시키는 것이 장한 것이냐? 죽는다, 잠잔다--- 다면 그것뿐이다. 잠들면 모든 것이 끝난다. 번뇌며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이며. 그렇다면 죽음, 잠, 이것이야말로 열렬히 희구할 생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잔다, 그럼 꿈도 꾸겠지. 아, 이것이 문제이다. 대체 생의 굴레를 벗어나 영원한 잠을 잘 때 어떤 굼을 꾸게 될 것인지, 이를 생각하니 망설여질 수밖에--- 그러나 이러한 주저가 있기에 인생은 일평생 불행하게 마련이지. 결국 이러한 분별심 때문에 우리의 결심 위엔 창백한 병색이 드리워져, 의기충천하던 큰 뜻도 마침내 발길이 어긋나 실행력을 잃고 말거든.
(p. 84)
인간이란 결심을 해놓고도 스스로 깨뜨리게 마련이오. 지기(志氣)란 결국 기억의 노예에 불과한 것, 날 때의 기세는 장하나 지속력이 약하거든. 글쎄 이건 설익은 열매 같다고나 할까, 가지에 매달려 있다가도 익으면 저절로 떨어져 버리거든. 자신의 빚을 스스로 갚기를 잊어버린다는 것도 인정의 필연. 열정에 달아 스스로 약속한 일도, 열정이 식으면 그 결심을 잊어버리오. 슬픔이나 기쁨이나, 일단 격정이 지나면 실행력은 자취를 감추고 마오. 우리의 뜻과 운명은 상반되기 때문에 마음속의 계획은 항상 뒤바뀌고 마오. 실로 뜻한 것은 자유이지만, 성과는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오.
(p. 100)
환락 뒤에는 애상이 깃들이는 법. 사소한 이유로 희비는 엇갈리게 마련이오. 인생은 무상, 그러니 우리의 사랑이 운명의 변화와 더불어 변한다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오. 과연 사랑이 운명을 제어하느냐, 운명이 사랑을 제어하느냐, 이는 아직도 미해결의 인생 문제요.l 세도가가 몰락하면 수하 도당들도 배반하고, 미천한 자가 천운의 뜻을 이루면 어제의 원수도 친구로 변하잖소. 이는 사랑이 운명의 종이라는 증거이며, 부유한 자는 친구가 늘 주변에 모여드는 반면, 가난한 자는 부실한 친구를 떠보다가 도리어 단면에 원수가 되고 마는 법이오.
(p. 101)
습관이라는 괴물은 악습을 씹어 삼키고 인간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반면 천사와 같은 일면도 있어, 항상 좋은 행동을 하면 처음에는 어색한 옷 같지만 어느새 몸에 꼭 어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밤을 참으시면 내일 밤엔 한결 참기가 쉬워지고, 그 다음날 밤엔 더욱 쉬워집니다. 이렇듯 습관이란 천성을 변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악마라도 물리쳐서 영원히 내쫓을 수 있는 비상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p. 122)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만약 인간의 주요 행위와 일생의 영위가 단지 먹고 자는 것뿐이라면? 그렇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신이 인간에게 무궁한 판단력을 부여하여 전후를 살피도록 해주심은, 그 능력과 신과 같은 이성을 쓰지 않고 곰팡이가 슬도록 하시려는 것은 아니렷다. 과연 그렇다면 짐승처럼 잊기 쉬운 탓인지, 또는 일의 결과를 너무 세심하게 염려하는 소심한자의 주저 탓인지, 아니면 사려란 4분의 1만이 지혜이고 나머지 3은 언제나 두려워하는 탓인지--- ‘이 일만은 해야겠다.’고 입에 올리면서 왜 시간만 허비하고 있느냔 말이다. 내 그 일을 실행할 만한 명분과 의지와 실력과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p.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