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1,2)
존 스타인벡 / 민음사
(2012. 02. 11.)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건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인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바로 성령인지도 몰라.
바로 인간의 정신. 사람들이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말이지.
어쩌면 모든 사람이 하나의 커다란 영혼을 갖고 있어서 모두가 그 영혼의 일부인지도 몰라.
(p. 1-52)
어머니는 햇빛이 비치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통통한 얼굴 표정은 부드럽다기보다 온화하게 잘 절제되어 있었다.
개암 빛깔의 눈은 온갖 고생을 다 겪고, 계단을 오르듯 고통을 극복해서
대단히 차분하고 초인간적인 이해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그것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가족의 요새며, 그 요새는 결코 점령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고통과 두려움을 인정하면 톰 영감과 자식들도 고통과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런 감정을 부정하는 법을 연습해 왔다.
또한 즐거운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가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족들이 먼저 살폈기 때문에,
어머니는 별로 웃기지 않은 일에도 웃음을 터드리는 습관을 익혔다.
그러나 즐거움보다 더 좋은 것은 차분함이었다.
어머니가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아야만 가족들이 어머니에게 의지할 수 있으니까.
위대하면서도 하찮아 보이는 가족 내의 그 위치에서 어머니는 깨끗하고 차분한 아름다움과 위엄을 얻었다.
(p. 1-153)
아냐. 그렇지 않아 너도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면 안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너무 생각을 많이 하면 지치기만 할 뿐이지.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수많은 가능성이 있지마, 실제로 우리가 살게 되는 삶은 하나뿐이야. 만약 내가 그 가능성들을 다 생각해 본다면 견디기 어려울 거다. 넌 아직 어려서 앞날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마, 난 그냥 지금 이 길만 생각해.
(p. 1-256)
대지주들, 소요가 일어나면 땅을 잃을 수밖에 없는 대지주들은 역사를 살펴보고 굉장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재물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면 반드시 누군가가 그 재물을 뺏앗아 간다는 것. 그리고 이와 더불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다 보면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빼앗기 위해 무력을 동원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역사를 통틀어 작은 소리로 비명을 질러 대고 있는 또 다른 사실 하나. 억압은 억압다는 자들을 강하게 만들고 단결시킬 뿐이라는 것.
(p. 2-22)
“저놈들이 모두 없어지더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거야. 살아남을 사람은 바로 우리야. 놈들은 우리를 쓸어 버러지 못한다. 그럼 우리가 살아남을 거야. 계속.“
“우린 항상 얻어맞기만 하잖아요.”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강해진 건지도 몰라. 부자들은 조금 있으면 죽어 버리고, 그 자식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게다가 그놈들도 그냥 죽어 버리지. 하지만 말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계속 새로 나타나. 절대로 불안해하지 마라, 다른 시대가 오고 있어.”
(p. 2-114)
기업들, 은행들도 스스로 파멸을 향해 가고 있어지만.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농사는 잘되었지만 굶주린 사람들은 도로로 나섰다. 곡식 창고는 가득 차 있어도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구루병에 걸렸고 펠라그라병 때문에 옆구리에서는 종기가 솟아올랐다. 대기업들은 굶주림과 분노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어쩌면 품삯으로 지불할 수도 있었을 돈을 독가스와 총을 사들이는 데, 공작원과 첩자를 고용하는데,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사람들을 훈련하는 데 썼다. 고속도로에서 사람들은 개미처럼 움직이며 일자리와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p. 2-120)
남자들은 단계별로 인생을 살아요. 아이가 태어나고 사람이 죽는 것. 그게 또 한 단계예요. 하지만 여자들에게 삶은 전부 하나의 흐름이에요. 개울처럼, 소용돌이처럼, 폭포처럼. 강처럼 그냥 계속 흐르죠. 여자들이 보는 인생은 그래요. 우린 그냥 죽어서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계속 살아간다고요. 조금 변하기야 하겠지만, 삶은 계속되는 거예요.
(p. 2-410)
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땅을 갈고 풀을 벨 때 말을 이용하지. 하지만 말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녀석들을 굶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건 말 얘기지. 우린 사람이쟎아.
여자들은 남자들을 지켜보았다. 결국 파국이 왔는지 보려고. 여자들은 말없이 서서 지켜보았다. 모여 있는 남자들의 얼굴에서 공포가 사라지고 대신 분노가 나타났다. 여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아직 파국은 오지 않았다. 두려움이 분노로 변할 수 있는 한, 파국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작은 새싹들이 땅을 뚫고 솟아나왔다. 며칠이 지나자 산들은 연한 초록색으로 물들어 또 한 해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p. 2-431-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