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문재인 / 가교

(2011.11.04.)


 

나는 6월항쟁이야말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사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아야 할 운동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 6월항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이었지만, 나는 그 운동의 중심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부산에서 제일 먼저 국본을 결성했고, 기간 내내 시위를 가장 치열하게 전개해 타 지역 시위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결정적으로는 명성성당 농성이 해산돼 서울 등 타지역의 시위가 급격회 위축됐을때 부산에서 가톨릭센터 농성과 함께 더 많은
시민들이 더욱 치열하게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항쟁의 불꽃을 되살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항쟁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P.64)

 

3당 합당 이전의 부산은, 부마항쟁으로 유신독재를 끝내고 6월항쟁으로 5공 독재를 끝냈듯이, 부산이 일어서면 역사를 바꾼다는
시민들의 자부심이 충만했다. 그런 높은 시민의식 속에서 전통 야도였던 부상이 3당 합당으로 하루아침에 여도로 바뀐 후,
오늘날까지 한나라당 일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P.65)

 

나는 '원칙' 얘기를 했다.
"우리가 쭉 살아오면서 여러 번 겪어 봤지만, 역시 어려울 때는 원칙에 입각해서 가는 것이 가장 정답이었다.
뒤돌아보면 늘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땐 힘들어도 나중에 보면 번번이 옳은 것으로 드러났다. 노후보님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렸다. 외로우셨던지 당신 생각을 지지하자 매우 기뻐했다.
(P.99)

 

대학 시절 나의 비판의식과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그 무렵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했듯 리영희 선생이었다.
(P.131)


대통령은 어짜다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됐을까. 나는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했다. 가난이 그를 공부에 매달리게 했고,
가난이 그를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그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자신처럼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돕겠다고 소박하게 시작한 일이 인권변호사였고, 민주화운동이었다. 정치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정치에 대한 거의 진정성이 그를 대통령까지 만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자신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에 변호사하면서 가난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다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을
돕는 삶으로 빠져들면서 자신은 도로 가난해졌다. 봉하마을은 외진 곳이어서 땅값이 엄청 싼데도 사저 건축비용이 없어 은행 대출을 받았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도 빌리게 됐다. 대통령은 나에게 "내 자신만 정치적으로 단련되었지, 가족들은 정치적으로 단련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은 대통령에게퇴임 이후의 대책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노 대톨영 서구 후 상속신고를 하면서 보니 부채가 재산보다 4억 원 가량 더 많았다.
(P.406)


대통령 유골을 백자 도자기와 연꽃 석함에 넣어 안장했다.
석함에 부장품을 두 개 넣어드렸다. 하나는 대통령 서거 후 추모인파를 촬영한 추모영상이다. 또 하나는 "참여중부 5년의 기록"이란
5부작 다큐멘터리 DVD다.
다큐멘터리는 대통령 임기 내내 혼신의 힘을 다한 5년을 기록한 것이다. 실패한 정부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청와대를 떠났다.
진보진영으로부터도 진보를 망친 장본인인 것처럼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 우리를 정당하게 평가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때 5년간의 기록이야말로 평가의 토대다 될 것이다. 대통령은 모든 걸 혼자 안고 떠났다. 인간의 법정을 거부하고
역사의 법정을 선택했다.
(P.4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