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셀린 벨로크 / 류재화 / 자음과모음 / 260쪽

(2019. 5. 20.)

이 책은 여느 철학책과는 다르다. 철학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하면서 우리의 삶을 개선하려는 야망 같은 것을 갖는다. 대부분의 철학서는 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이론적 근거를 끌어내는 데 전력을 다하느라 실제 응용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삶을 바꾸기 위해 한 위대한 철학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갖고자 한다. 우리의 실존이나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에 대해 시선을 던지듯 디테일한 우리 일상 하나하나에까지도 시선을 던지면서 말이다.

(P.7)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 할 뿐 행복이 하나의 환상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행복하다고 믿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또 하나는 좋은 순간을 그저 누리는 것. 그런데 이 두 행복의 길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다. 휴식과 안녕은 애초에 불가능한 삶이다. 행복 찾기는 불안과 고통, 불만족이라는 멍에를 반드시 씌운다. 마지막에도 처음처럼 그렇게 좋을까? 우리 인생을 비춘 그 수많은 약속들은 우리 마음을 그토록 이끌었건만 약속들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P.35)

행복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할 때는 우리 뒤에 있다. 행복했는데도 그때는 모르고 항상 너무 늦게 아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이렇게 묘사했다. "햇볕 드는 평야 너머로 바람이 밀고 갈 작고 어두운 구름." 행복은 항상 지나갔거나 올 것이라는 것이다. 행복은 둘 사이에, 즉 현재에는 잡을 수 없는 연기처럼 나타난다고, 행복은 감각이라기보다는 생각인 것이다.

(P.44)

이성은 인간을 조금도 해명하지 못한다. 반대로 이성은 그것이 창조된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적절하게 사용된다. 본능적 충동만이 훨신 효과적일 것이다(이성의 조명 아래 본능이 구속된다!) 가끔은 선택을 하는 데 있어 생각을 깊이 하고 심사숙고를 하면 할수록 더 혼란스럽다. 길을 잃는다. 결정할 수가 없다. 결국 모든 심사숙고에서 나와 비이성적인 본능적 직감으로 결정하고 행동하지 않나? 거기서 주목할 만한 발전이 나타나 놀라기도 하는데, 이성은 우리에게 빛을 가져다준다고 하지 않았나 하고 여전히 믿어서다. 사실상 이성은 혼돈과 속임수와 고통의 요소일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의지는 평균치를 벗어난 비합리성 속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그저 뿌리 깊고, 일관되며, 비논리적이고 스스로를 먹어치우며 터무니없이 부조리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호주의 개미-불독과 비유했다. 이 개미는 잘린 듯 둘로 나뉘 개미로 두 부분이 서로 다투는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는 꼬리를 물고, 고리는 자기 바늘로 용감하게 방어한다. 우리들 역시 이렇게 나뉘어 있다. 그리고 이런 투쟁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우리는 늘 스스로에 대해 일정한 동요를 겪는다. 우리에게 부합하지 않는 이상에 부합하려고 애쓴다. 우리의 진짜 모습에 우리는 겁이나며, 우리 모습 그대로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회개라는 통렬하고 쓰리다 못 해 뼈아픈,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스스로 떠안는 것이다.

(P.106)

결국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생에 고통스럽게 집착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를 심리학자처럼 말하고 있기도 하다. 무의미한 활동 속에서 우리를 잃어가며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아 망쳤다는 느낌. 무언가 망쳤다는 느낌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시간을 원하게 만들고, 성공할 기회를 더 갖게 싶게 만든다. 다시 하면 더 잘할수 있을까? 그런데 어느 날 미 모든 것이 이미 늦었고 영영 다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도래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이 든다. 하지만 이런 중압감에서 벗어나 가벼워지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다른 경우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 오로지 영원만이 실재이고, 유한한 시간은 외양에 불과하다.

선전인 시간으로부터 구원된 세계를 보는 것, 그 세게에 모든 것이 여러 가능성 형태로 현존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시간의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우리는 이제 '고통의 대가를 치를 만한 어떤 것'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의무로부터 벗어난다. 행해지지 않은 것, 빛을 보지 못한 보물들, 보지 못했거나 창조되지 못한 아름다움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현될 것ㅇ디ㅏ. 이 다른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변형일지 모른다.

(P.139)

자연이나 예술 작품을 관조하는 또 다른 암묵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는 세계라는 무대 속에 빨려 들어가 잠시 우리 자신을 잊는 것이다. 사실상 자신의 쾌락과 이익, 만족 증의 추구 속에 있는 이상 우리는 삶의 의지나 여러 요구사항과 그에 따른 실망과 좌절 속에 예속되어 있는 셈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놓여날 필요가 있다. 특히나 세계의 중심에 더 이상 자신의 에고를 놓지 말고, 세계 그 자체를 중심에 놓는 것이다. 이것이 관조의 미덕 그 자체다. 이런 미덕 속에서, 우리는 관조되는 대상에, 가령 유일한 현실일 수도 있는 풍경에만 온통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해체되는 듯하고 나부기는 듯하다. 의식은 마치 풍경 속에 흡수된 시서일 뿐이며, 풍경과만 무엇을 할 분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런 순간들만큼은 우리의 에고에서 벗어난다.

이를 추구하는 목적은 '의지'에 습관적으로 예속된 우리의 앎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우리의 개인적인 나를 잊는 것이기도하다. 의지 없는 눈이 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세계는 하나의 무대 혹은 하나의 표상이 된다. 그것은 더이상 우리 삶의 의지가 작동되는 곳이 아니다. 어떤 것도 우리를 격력하게 동요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일몰을 관조하는 눈이 동굴에 있든, 왕궁에 있든, 그 무엇이 주요하겠는가. 이 눈이 위력을 지닌 왕의 것이든, 불쌍한 거지의 것이든 그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이런 집착에서 벗어나면 피로나 행동해야 할 필요 같은 끝없는 사슬에 더는 묶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가능한 한 관조를 해야 한다. 우리가 몰두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임을 깨달으면 평화의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P.154)

자애는 자아를 포기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어떤 감정이나 욕망 따위도 포기하게 만든다. 자애는 범사랑을 만든다. 바로 그래서 해방을 향한 길인 것이다.

정의와 자애를 실천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고통을 하소연하는 태도를 갖지 않는다. 우리는 인생이 달콤하기를 더는 갈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우린 더 이상 도망가는 태도를 갖지 않는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우리가 실존 속에서 겪는 전투가 거칠고, 옥죄고, 끝이 없다고 해서 우리 자신 안에 더는 숨지 않는다. 우리는 마침내 그런 고통이 어쩔 수 없으며,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고통 받는 것이 두렵지 않다. '단식'이나 '고행'을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힘과 새로운 평화가 주어진다.

쇼펜하우어는 구원의 두 길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자아와 의지로부터 초연해지는 두 가지 방법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 관조의 평온함(가령, 예술이나 자연을 통하여)

- 이른바 섬과, 이 말이 너무 막연하다 싶으면, 아주 잠시, 살고자 하는 의지의 부정이 솟구침.

(P.187)

인간은 더는 고통 받고 싶지 않으나 그 고통이 자기 고유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몸이 시키는 대로 자연스럽게, 본능에 따라 하면 고통은 또 온다. 앞 장에서 부각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고통을 내밀하게 체험하고 나면 해방되기 위해서라도 자기 본성에 반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삶을 부정하는 것... 그런데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현실 세계에서는 다소 말이 되지 않기에 사람들은 신화와 종교와 역사의 상상력을 동원해 이런 부정을 이해하려 했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로서 이런 부정의 필요성을 형이상학적 논리와 논점으로 깨닫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원시적이고 정화된 형태(신비 신학에 가까운)의 기독교 예를 들기도 하고, 이슬람의 신비주의나 수피주의, 특히 불교와 브라만교의 예를 들기도 한다.

그의 글에서 환기된 종교는 신앙 차원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그 어떤 종교의 윌원도 아니고, 새로운 종교의 일원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형이상학은 그저 삶과 생명에 대한 경험과 시선에서 나온 것으로, 이전 선조들의 메시지와도 맥이 닿는데, 직감을 통해 우주적 통찰을 하는 것이다.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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